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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과학 아버지’ 첸쉐싼에 영향 준 장바이리

중앙선데이 2016.10.16 00:30 501호 28면 지면보기

첸쥔푸와 첸쉐썬 부자. 중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군사 과학자 첸쉐썬의 인생 중 첫 번째 모습이기도하다. 1913년 1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제공]



문혁이 한창이던 1970년 4월 중국은 최초의 인공위성을 쏴 올렸다. 발사 하루 전날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해산 무렵 첸쉐싼(錢學森·전학삼)을 불렀다. 부탁이 있다며 입을 열었다. “제발 과로하지 마라.”


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99-

2009년 10월 31일 첸쉐싼이 세상을 떠났다.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미사일과 로켓의 왕(王)이 눈을 감았다”며 중국 천지가 발칵 뒤집혔다. 한 신문이 첸쉐싼이 자주 하던 말을 소개했다. “일생을 통해 두 분에게 많은 영향과 도움을 받았다. 개국총리 저우언라이와 장인 장바이리(蔣百里·장백리)의 보살핌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아버지 첸쥔푸(錢均夫·전균부)에 관한 얘기는 남들이 대신 해줬다. “첸쉐싼의 첫 번째 스승은 부친이었다. 박학다재하고 겸손하기가 이를 데 없는 애국자였다. 자손들에게는 집안 전통이라며 지나칠 정도로 엄격했다. 루쉰(魯迅·노신)도 첸쥔푸 앞에서는 말을 가렸다.”



첸쥔푸는 항저우(杭州)의 몰락한 비단장수 아들이었다. 할아버지 생존시에는 집안이 살 만했다. 그 덕에 유년시절 좋은 교육을 받았다. 저장(浙江)대학의 전신인 명문 구시서원(求是書院) 시절 품행이 단정하고 성적이 우수했다. 거상(巨商) 장(章)씨가 딸 란젠(蘭娟·난연)의 남편감으로 눈독을 들였다. 첸쥔푸도 장씨를 잘 따랐다.



 



[어머니 영향 받아 지식욕 남달라]장란젠은 매사에 열정이 넘쳤다. 계산능력과 기억력은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상상력도 풍부했다. 첸쉐싼의 회상을 소개한다. “엄마 유전자 물려받았다는 말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우리 엄마는 감정이 풍부하고 호기심이 많았다. 순박하고 선량했다. 내 손 잡고 베이징 거리 나갈 때마다 걸인들 앞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수학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림도 잘 그렸다.”



장란젠은 아들의 유년교육을 전담했다. 요구가 추상 같았다. “동틀 무렵,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신체를 단련해라. 조반 후, 당시(唐詩)를 큰소리로 암송해라. 피곤하면 동화책을 읽어도 좋다.” 오후에는 그림과 붓글씨 교육을 거르지 않았다. 해를 거듭 할수록 첸쉐싼의 지식욕이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동화책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아버지 서재에 있는 책에 더 흥미를 느꼈다. 두툼한 책을 들고 엄마에게 달려가 물어보곤 했다.



첸쥔푸도 첸쉐싼에게 고전과 역사공부 소홀히 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했다. ”중국 고전을 섭렵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민족의 특성과 인생관이 그 안에 다 들어있다. 조국의 역사를 제대로 정독하지 않은 사람에게 애국을 바라는 것처럼 허망한 일도 없다.”



 

장바이리는 바오딩(保定)군관학교 교장과 육군대학 총장 대리(총장은 장제스)를 역임하며 수많은 지휘관을 양성했다. 군관학교 교장 시절의 장바이리. [사진 김명호 제공]



[장바이리, 열세살 때 향시 1등 합격]첸쥔푸는 서원 동기 장바이리와 함께 일본유학을 떠났다. 장바이리의 조부는 대장서가였다. 일찍 분가했던 아버지는 장바이리가 열세살 때 세상을 떠났다. 책 외에는 유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 숙부는 부자였다. 선생을 초빙해 자녀들을 교육시켰다. 장바이리는 눈만 뜨면 숙부 집으로 달려가 사촌들 공부방을 귀동냥했다. 하루는 선생이 장바이리의 모친을 찾아왔다. “네 아들은 대가의 자질을 타고났다. 내가 직접 가르치고 싶다. 학비는 필요 없다.” 장바이리는 선생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열여섯 살 때 향시(鄕試)에 1등으로 합격했다.



지방 관리들이 장바이리의 재능을 인정했다. 친구가 설립한 구시서원을 소개했다. “너 같은 수재를 안 것만도 영광이다. 학비 걱정 말고 계속 공부해라.” 장바이리와 첸쥔푸는 학생 중 발군이었다.



관리들의 애정은 끝이 없었다. 친구들에게 제안했다. “장바이리는 큰일을 할 인재다. 일본유학을 보내고 싶다. 국가를 위해, 유학 경비를 우리가 출자하자.”



장바이리는 “군사학을 공부하겠다”며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했다. 한 번도 1등을 내주지 않았다. 졸업식 날 생도 대표로 천황이 주는 칼을 받았다.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첸쥔푸도 도쿄고등사범(東京高等師範)에 무난히 합격했다.



 



[동방 제1의 군사가 소리 들은 장바이리]당시 일본에는 3000여 명의 중국유학생이 있었다. 장바이리는 중국학생회를 이끌며 동향출신으로 구성된 저장동향회(浙江同鄕會)도 탈 없이 꾸려나갔다. 문호(文豪) 루쉰의 첫 번째 글 ‘스파르타의 혼’이 실린 종합성 잡지 저장차오((浙江潮)의 발행인도 장바이리였다.



장바이리는 일본의 군사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청일전쟁에서 우리가 패한 이유는 간단하다. 전쟁은 장비 싸움이다. 명색이 장군이라는 사람들이 국방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전쟁 준비에 소홀했다.”



장바이리는 생전에 “동방 제1의 군사가(軍事家)” 소리를 들었지만, 단순한 군사가에 그치지 않았다. 국제무대에서는 무솔리니를 설득했고, 학계에서는 『서구 문예사상사』를 저술한 서구미술 연구의 권위자로 통했다.



장바이리는 첸쥔푸만 만나면 하는 말이 있었다. “네 부인은 중국에서 가장 총명한 여인이다. 아들이 태어나면 내 딸과 결혼시키자.” 이런 장바이리였지만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딸 장잉(蔣英·장영)과 천쉐싼의 결혼은 보지 못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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