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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和而不同 이미 흘러간 이상 자유와 평등이 답

중앙선데이 2016.10.16 00:27 501호 28면 지면보기
어느 세계나 이상사회(理想社會)에 대한 동경이 있다. 유토피아(Utopia)란 ‘없는 곳’이지만 종종 사람들은 지나간 과거의 이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동양 사회, 동양의 이상도 마찬가지다. 이미 너무나 많이 써먹었고 유통기간도 지났지만 지나간 이상임을 깨닫지 못할 때가 있다. 한번 털고 갈 일이다.



공자(孔子)는 사회를 화이부동(和而不同), 즉 ‘조화’(和)와 ‘동일’(同)의 대립으로 봤다. 조화란 모든 계급이 각자의 기능에 충실하며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직급이 지도자를 중심으로 맡은 바를 충실히 실행해 유기적인 조화를 이룬다. 이를 이룬 곳이 조선(朝鮮)이었고 이를 강조하는 곳이 일본이다. 일본은 자신을 화(和)라 하며 음식조차 화식(和食)이라 이를 정도다.


동양학 가라사대

조화에 반대는 불화(不和)가 아니라 동(同)이다. 지도자가 권력을 나누는 방식의 차이에서 화와 동이 갈린다. 지방분권이 조화라면 중앙집권은 동이다. 독재자는 다양한 계급과 직능의 조화를 무시하고 세상을 일사분란하게 만든다. 진시황(秦始皇)이 그랬다. 오늘날이라면 더더욱 부정적이다.



이상적이라 여기는 조화는 기만적인 얼굴을 갖는다. 동양에서 말해온 조화를 이루려면 먼저 상하의 계급이 있어야 한다. 위아래가 함께하는 감성과 직능, 그리고 차별된 계급의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가 필요하다. 농노와 사무라이, 노비와 양반이 유기체적인 조화를 이룬다. 문제는 계급적이고 폐쇄적인 사회에서는 개인적 자유나 의견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데 있다. 평생 고용을 기본으로 하던 일본의 회사 조직문화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개인은 조직의 부분이며 조직의 조화를 위해 존재한다는 이념으로 보자면, 조화란 결국 분권화된 독재다. 평민의 입장에서는 조화나 동일이나 억압적이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화나 동이나 그저 귀족들 사이에 권력을 나누는 방식의 차이뿐이다. 때문에 조화의 강조는 결국 무조건적인 복종을 바라는 조폭 윤리나 다를 바 없다. 이상은 아니다. 현대는 조직이 아닌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이 중심이다. 충성해야 할 주군(主君)도, 조화를 위해 희생해야 할 조직도 없다. 신자유주의는 평생 직장이 아닌 임시직이나 프리랜서를 말한다. 직장과 사회가 평생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면 당연히 복종이나 조화를 강요할 수 없다.



지나간 강물에는 들어갈 수 없다. 그렇게 동양의 조화의 이상도 지났다. 도시의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시민 윤리를 기초하여 새로운 이상을 세워야 할 때다. 조화도 일사불란도 아닌 자유와 평등이라는 수평적인 사회와 조직이 답이다. 이제는 조직을 위한 개인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이 서로 존중하는 이상을 생각해 볼 때다. 독재가 아닌 만큼 조화도 아니다.



 



이호영



현 중앙대 중앙철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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