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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의 달인 고선웅이 각색을 하지 않는 이유

중앙선데이 2016.10.16 00:24 501호 30면 지면보기
포스터 속 백발 노모의 공허한 눈길에 깊은 한숨이 묻어난다. 거친 파도를 맞고 있는 처진 어깨 위엔 헤아릴 길 없는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무대 위 어촌 마을의 허름한 초가집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는 그녀의 하루는 참담하기 짝이 없다. 국립극단의 신작 ‘산허구리’ 얘기다.



『산허구리』(1936)는 국립극단이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 여섯 번째로 선택한 작품이다. 요절한 월북작가 함세덕이 스물한 살에 쓴 첫 희곡이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궁핍한 현실과 시대의 모순을 생생히 고발한 리얼리즘 희곡의 걸작이지만, 작가의 월북 이력 탓에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해 오다 이번에 처음으로 무대화가 성사됐다.


연극 '산허구리', 10월 7~31일 백성희장민호극장

올 들어 ‘겨울이야기’‘빛의 제국’‘갈매기’‘나, 말볼리오’‘로베르토 쥬코’ 등 외국 연출가를 부쩍 자주 기용하고 있는 국립극단이 간만에 선보인 토종 프로덕션인데다, 요즘 공연계 블루칩으로 통하는 고선웅 연출의 신작인지라 관심이 집중됐다. 국립극단과 고선웅은 지난해 중국 희곡을 각색한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으로 주요 연극상을 휩쓸더니, 올 4월 독특한 컨셉트의 집단 창작극 ‘한국인의 초상’으로 호평받은 데 이어 또 다시 전혀 다른 색깔의 무대로 손을 잡았다.



하지만 흔히 ‘명랑비극’으로 통하는 고선웅표 재기발랄함을 ‘산허구리’에서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세상사의 비극을 훨씬 더 거대한 개인의 역사 차원에서 화해와 희망으로 끌어안는 고선웅의 시선은 이 무대에 없다. 특유의 만화적 상상력으로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만의 언어도 찾아보기 힘들다.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대학 졸업 이후 처음 도전한 리얼리즘 연극’인 것이다.



사실 고선웅은 ‘각색의 달인’이다. 각색의 방향은 역시 비극 속에서 희망 길어 올리기로 통한다. 최근작 ‘곰의 아내’만 해도 원작자 고연옥이 의도한 ‘자녀 살해’의 선명한 비극을 신화적으로 에둘러 표현해 고 작가로부터 “내 작품과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런 그가 굳이 80년전 스물한 살의 작가가 쓴 대본을 거의 손대지 않고 그 시대 하층민들의 비극을 고스란히 살려낸 것이다. 고선웅은 왜 그랬을까.



간밤에 폭풍우가 할퀴고 간 해안가 작은 마을, 몇해 전 장남과 사위를 풍랑에 잃은 노어부 가족은 가장 노릇을 하던 차남 복조까지 풍랑으로 생사를 알 수 없게 됐다. 상어에게 물려 한쪽 다리를 잃은 어부는 술로 세월을 보낼 뿐 대책이 없다. 끝내 복조가 시신으로 돌아오자 노모는 미쳐 날뛰고, 이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막내 석이에게 삶의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극사실적으로 옮겨다 놓은 1930년대 어촌 풍경이 요즘 세상에 대체 무슨 의미일까 싶은 생각도 잠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악다구니가 지금과 전혀 다를 바 없음을 발견한다. 발동기 단 일본 배들이 일으키는 강한 물결에 속절없이 휩쓸려 목숨을 차례차례 내놓아야 했던 저 어민들의 신세는 가방에 컵라면을 넣고 끼니도 거른 채 위험을 무릅쓰고 동분서주 해봤자 가난을 벗어날 수 없도록 구조화된 ‘흙수저’ 계급의 현실인 것이다.



하지만 함세덕이 ‘한국 근대 최고의 극작가’로 높이 평가받는 건 단순히 심란한 시대상에 리얼리티의 확대경을 들이댔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누나야 어머니는 한세상 참말 헛사셨다. 왜 우리는 밤낮 울고불고 살아야 한다든. 왜 그런지를 난 생각해 볼 테야.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지를.” 석이의 이 한마디 대사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겠지’라는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왜 그런지를 생각해 보겠다’는 문제의식을 가졌다는 데에 1930년대를 산 함세덕의 위대함이 있다. 울고불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 ‘왜?’라는 질문 던지기를 시작한 스물한 살의 청년 작가가 이미 80년 전에 존재했다는 것. 고선웅이 굳이 각색을 하지 않은 이유가 아닐까.



오직 마지막 장면만 고선웅답게 힘을 줬다. 초상 치를 준비를 하라는 윤 첨지의 퇴장으로 쓸쓸히 막을 내리는 원작과 달리, 실성한 노모가 죽은 아들을 만나 후련히 떠나보내는 한바탕 씻김굿과 같은 장엄한 미장센으로 이 비극에 일말의 카타르시스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다만 홀로 장엄한 이 엔딩이 혹여 객석의 여운을 다 씻어내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80년 동안 공연되지 못하고 희곡 원고 속에 잠들어 있던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라는 질문이 힘차게 깨어나는 순간이 되기를 바랄 뿐.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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