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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고향<164>부안 김씨

중앙일보 1986.10.18 00:00 종합 9면 지면보기
우리 나라의 김씨는 크게 두 갈래다. 가락국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계와 신라의 알지를 시조로 하는 경주 김씨계.

부안 김씨는 그중 경주에 연원을 두고 있다. 신라 마지막 임 김경순 왕의 장자 일을 시조, 고려 조 경수를 1세, 6세 구를 증시조로 세계를 헤아리는데 일부에서는 일음 1세, 증시조 구를9세로 세계를 달리 주장하기도 한다.

신라 마의태자 증손이 부안서 뿌리내려|학자·충신·열사들을 많이 배출|중시조 구는 명문장으로 원세조 굴복시켜

일은 망국의 한을 품고 개골산에 들어가 일생동안 숨어 산 바로 마의태자다.

천년 사직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자 태자는 어머니 죽방왕후 박씨와 부인 김씨,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충신열사를 거느리고 월성(경주)을 떠나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 전한다.

망한 나라를 조상하고 광복 결의를 다지는 뜻으로 삼베옷만 입고 지내 사람들이 일컫기를 마의태자라 했다.

<경주떠나 개골산에>

정사에는 태자의 후손이 없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부안 김씨 족보는 태자가 3남1녀를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증손 경수가 벼슬길에 나오기까지 자손들이 고려의 세력이 두려워 산악지대 심산유곡을 전전하며 숨어 지낸 바람에 일부 상계가 불명한데서 잘못 전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경수는 고려 선종 때 문과에 급제, 이부상서를 지냈고 그의 아들 춘 또한 문과에 급제, 부령부원군에 봉해지면서 부안군이 부안 김씨의 관향이 됐고 뿌리를 내리게 됐다.

부안군은 원래 부령현. 일부 부안 김씨들은 관향을 부령이라 말하기도 한다.

부안 김씨는 대대로 학자·충신·열사를 배출, 명문의 열에 올라섰다. 조선조 문과 급제자만 31명, 무과 급제자 55명. 『생원·음사까지 합치면 8백 명이 넘는다』고 종친회에선 말한다.

중시조 구는 고려조 고종9년(1222년)12세 어린 나이에 성균 조사선에 뽑혔으며 약관 22세때 문과에 급제, 정원부사 녹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40여년간·정사에 참여, 학자·정치가·외교관으로 활약했다.

성품이 강직해 한때는 모함을 받아 제주판관으로 좌천되기도 했으나, 어디서나 선정을 베풀어 목민관의 표본이 됐다. 권신 최항이 원각경을 조각하면서 발문을 써달라고 청하자 이를 거부하고 조원각경을 지어보내 위선을 비웃다가 파직을 당해 선학동에 낙향, 자연과 거문고를 벗해 10년을 보내기도 했지만, 다시 불림을 받아 관직이 평장사·첨의부찬성사경 보문관 대학사에 이르렀다.

문장이 뛰어나 원에 보내는 표를 많이 지었는데 원종 4년(1263년)원세조 「쿠빌라이」가 인질과 병정, 처녀를 장발해 보내라는 요청을 했을 때는 그같은 가렴에 응할 수 없는 사정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국서를 지어보내 이를 본 원세조가 감탄, 자신의 요구가 지나쳤음을 인정하고 오히려 양 5백마리를 보내 포상했다는 일화가 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주로 맡아 정확한 의사소통이 안되고 나라에 해를 끼치기 일쑤인 통역관제도의 문제점을 중시, 젊은 문신들로 대체하기 위해 통문관 (나중에 사역관으로 개명)을 설치하기도 했으며 이 제도는 조선조에도 이어졌다.

<통문관 설치 주인공>

충렬왕4년(1278년)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뛰어난 학문과 공적을 기려 조정에서는 문정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후손들은 무덤 옆에 경지재라는 재실을 짓고 해마다 음력 3윌1일에 시제를 지금까지 받들어 온다.

조선조 중종때는 고을 선비들이 부안읍 연곡리 도동산 기슭에 도동건원을 지어 그를 추모하고 있다.

그는 슬하에 4남2녀를 뒀는데 네 아들이 모두 문·무과에 급제, 가문을 빛냈다. 장남 여맹은. 충렬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가 4년간 인질이 되어 있을 때 호종한 공으로 『본인과 자손들이 아홉 번 죄를 지어도 용서한다』는 단권을 받았고 벼슬이 형부상서까지 올랐다.2남 숭맹은 수창궁녹사·예화부승·전교사부령을 지냈으며 3남 숙맹도 서도판관·승낭을 지내고 출가, 스님이 됐다. 법명이 충장 안화대선수다. 4남 승인은 대사성과 강능안무사를 지냈는데 맏형 여맹의 말을 좇아 학교를 세웠는데 이 무렵부터 전국에 학교가 다투어 세워지게됐다.

네 아들 모두 급제

여맹은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각은 평장사, 2남 식은 이부상서를 지냈고 각의 아들 지동은전의, 지동의 아들 용수는 대제학, 용수의 아들 인정은 중낭장을 지내는 등 대대로 문·무과급제자가 끊이지 않았다.

인정은 네 아들 세영·광숙·광신·광구 모두가 문·무과에 급제했다. 그중 세영은 한성소윤, 광숙는 고리군사를 지내는 등 벼슬길에 올랐으나 고려가 이성계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불사일군」을 외치고 벼슬길에서 물러나 부안으로 낙향, 후손들은 중시조구와 함께 음력3월1일에 향사를 올리며 그 충정을 기리고 있다.

경정의 네 아들. 전·광·명·협은 뛰어난 학자였으나 당파 싸움에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며 과거에 나가지 않고 평생 서책을 가까이 하며 후학지도에 전념, 선비의 사표가 됐다.

채방을 지낸 광의 아홉 아들가 운데 3남 무복은 문무를 겸비한 인걸. 임진왜난 때는 의병을 모아 성주·무주·금산 등지에서 왜병을 물리쳤고, 정유재란 때는 부친상을 당해 시묘 중임에도 권율의 추천으로 영광군수를 제수 받고 분연히 나가 명의 진린과 함께 왜병을 맞아 싸우다가 나주성교 싸움에서 49세를 일기로 전사했다.

익은 『권농가』지어

익복은 슬하에 유· 화· 연등 세 아들과 지백·지중·지순 등 세 손자를 두었다. 이들 아들·손자가 모두 왕란에 출전, 공을 세워 나라에선 「창의 일 문칠절」 이라는 포상을 내렸다. 부안 김씨네의 큰 광영이다.

조선조 영·정조 때 『권농가』를 지은 익과 『서호별곡능백 지은 그의 아들 상성은 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부안 김씨의 인물이며 택술은 조선조 말 호남지역 대표적 성리학자 전간제의 수제자로 17권의 문집을 내는 등 문명을 떨쳤다.

현재 김원술(한국국악협회 이사장)·김병수(국회의윈·신민당)·김형래(국회의원·신민당)·김형수(전 체신차관)·김종철(서울대 교수)·김형주(삼안건실 대표)등이 각계에서 활약한다.

남한에 약 1만 가구.

<지명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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