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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York Times] 트럼프가 대통령 될 가능성 여전한 이유

중앙일보 2016.10.11 00:01 종합 33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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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코언
NYT 칼럼니스트

도널드 트럼프는 무뢰한이다. 지난주에 터진 음담패설 스캔들을 비롯해 온갖 헛소리와 거짓말을 일삼아 왔다. 게으르고 부족하며 잠시도 집중하지 못한다. 독일 혈통의 ‘위대한 유전자’를 자랑으로 여기는 유전론자다. 트럼프에게 히스패닉과 무슬림들은 열성 유전자를 가진 하급 인종일 뿐이다.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 자리를 놓고 벌어진 토론에서 남성의 성기 크기나 여성의 생리·미스 유니버스의 식습관을 논쟁의 주제로 띄우는 데 성공했다. 클린턴의 폐렴 증상을 흉내 내며 조롱하기도 했다. 트럼프에게 지적인 호기심이라곤 그의 비싼 정장 바지 뒷주머니를 채울 만큼도 없다.

논리를 찾기 힘든 그의 횡설수설보다는 황금색 헤어스타일이 차라리 더 독창적이다. 냉전시대 스파이 소설 작가인 존 르 카레가 ‘고전적이고, 늘 불변하며 그야말로 러시아적인 뻔뻔한 거짓말’이라고 표현한 기술을 완벽히 습득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트럼프의 정치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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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거만하게 걸어 들어와 남을 깔보며 으스댄다. 1995년 소득 신고를 하면서 “9억1600만 달러를 손해봤다”고 태연하게 기록할 만큼 간 큰 사업가이기도 하다. 손실액이 너무 커 세금 계산 소프트웨어에 금액이 입력되지 못하는 바람에 트럼프의 회계사가 손으로 숫자를 써내야 했을 정도다.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을 비롯한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트럼프의 천재성이 드러난 사례”라고 강변한다. 트럼프는 95년 이후 몇 년 동안 매해 수백만 달러의 수입을 얻었지만 거액의 손실을 신고한 덕분에 세금은 한 푼도 낼 필요가 없었다. 고지식한 미국 근로자와 연방정부만 봉이 됐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남자가 미국인 수천만 명의 열화 같은 지지 속에 백악관 코앞까지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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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이다. ‘쇼크’란 한마디 외에 할 말이 없다. 첫 TV토론에서 트럼프는 이란 핵 협상에 여러 가지 얘기를 늘어놨지만 눈길을 끌 만한 내용은 없었다. 트럼프는 오바마 행정부와 테헤란 간의 핵 합의를 놓고 “지금까지 본 협상 중 최악”이라고 했다가 “이란이 북한에 영향력이 있으니 그걸 활용해야 한다”고 말을 바꿨다. 이란이 받은 돈이 ‘4억 달러’라고 했다가 토론 중반엔 ‘17억 달러’, 후반엔 ‘1500억 달러’까지 부풀렸다. 그러곤 또다시 “사상 최악의 협상 중 하나”라고 외쳤다.

트럼프가 이란 핵 합의 내용을 알 리 없다. 합의문을 읽어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 합의 덕분에 이란의 핵개발 능력이 2030년까지 현저히 축소될 것임을 트럼프가 전혀 모른 것도 당연하다. 이 합의로 이란이 추진해 온 원심분리기 개발이 무위로 돌아간 것이나 보잉사가 상업용 여객기 80대를 이란에 팔 수 있게 된 것도 트럼프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

지난 1년간 트럼프가 공화당 경선과 대선 유세를 통해 미국인들에게 보여준 건 무지와 무능, 그리고 게으르고 덜떨어진 인품뿐이다. 그런데도 이 남자가 다음달 미국의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작지 않다.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정치가 범인(凡人)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가운데 사실과 픽션의 경계선이 없어졌거나 그 구분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공포가 민초들의 삶을 잠식한 가운데 누군가가 그 공포를 손쉽게 조종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첨단 기술의 발달로 과거엔 인류가 알지도 못했던 불안이 증폭됐기 때문이다.

또 있다. 미국이 두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수조 달러를 낭비한 결과를 책임지지 않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2008년 금융위기를 일으켰음에도 그 죄를 인정하지 않는 워싱턴과 뉴욕의 엘리트 지도층에게 엿을 먹이려는 국민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세계화에 뒤처진 B급 백인들이 30년 안에 미국은 유색인종의 나라로 변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포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공화당과 민주당은 미국의 근로자들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워싱턴의 지도층이 무역자유화를 내세워 미국을 헐값에 팔아치우고 미국의 예외적인 힘을 폄하해 위대함을 희석시켰기 때문이다.

글로벌리즘에 젖은 ‘뉴욕좌파’들의 유치한 평등주의가 “백인의 생명도 소중하다”고 믿는 이들에게 반발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다른 인종에 대한 적개심이나 희생양을 찾는 비겁함 같은 가장 저열하면서도 뿌리 깊은 인간의 본능을 트럼프가 건드리고 칭송했기 때문이다.

백악관을 8년간 차지했던 클린턴 부부가 지난 25년간 부유층과 결탁하면서 기득권 정치세력의 정점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왕적 특권에 치를 떠는 미국인들 눈에는 클린턴이 부패 정치인의 전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어리석음에는 한계가 없음을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트럼프가 백악관을 넘보는 이변이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갈수록 막장으로 치닫는 이 남자를 막을 시간은 아직 있다. 바로 지금이다.


로저 코언
NYT 칼럼니스트

◆원문은 원문은 중앙일보 전재계약 뉴욕타임스 신디케이트 3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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