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은 “민족시인이라…그런 이름 이젠 지친다, 내려놔야지”

중앙일보 2016.10.10 00:08 종합 21면 지면보기
기사 이미지

지난 4일 자택 정원의 고은 시인. 2009년 시선집 『오십 년의 사춘기』 제목처럼 웃음이 해맑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시인 고은(83)의 삶과 문학은 요약이 어렵다. 그 세계가 워낙 방대하기도 하지만 어떤 틀이나 잣대로 재단되기를 태생적으로 거부하는 것처럼 보여서다. 때문에 문답으로 그를 낚아채기는 어렵다. 미끌미끌, 그는 빠져나간다. 시인이 새 시집을 냈다. 김소월의 시에서 제목을 딴 『초혼(招魂)』(창비)이다.

소월 작품과 동명 신작 『초혼』펴내
“먼저 간 이들 애도, 그 몫까지 살아야”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면서 올해 수상자 발표를 앞둔 미묘한 시점에 새 시집을 낸 그를 수원 광교산 자락 자택으로 찾아갔다. 미끌미끌한 대화를 나눴다.
3년 만에 새 시집이다.
“별 감회는 없다. 농부의 추수 같은 거다.”
제목이 ‘초혼’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며 살았다. 산다는 게 실은 죽음과의 동행이다. 6·25 전쟁이나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생각해봐라. 우리 조국 강토가 숱한 생명체가 쓰러진 현장이라고 생각하면 숨쉬는 공기까지 숙연하게 느껴진다. 그런 죽음과 무관하게 살 수는 없다. (나처럼)오랜 세월을 이 세상에서 견딘 생명체는 먼저 죽은 이들을 애도하고, 그들의 몫까지 대신해 살아야 할 사명도 있다. 그럴 때 우리 삶의 의미가 달라진다. 생존은 단순히 살아가는 거지만 인간의 삶은 과거와 미래가 합쳐져 만들어진다. 나는 사적인 존재이지만 사적일수록 다른 사적인 것들과 관계를 맺을 공적인 의무가 있다. 그 의무를 문학이 져야 한다. 시대의 짐이다.”
 
김소월의 ‘초혼’은 그냥 사랑시 아닌가.
“ 비련(悲戀)의 시로 알고들 있는데 아니다.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의 충격을 담은 시다. 소월은 과민한 사람이었다. 1920년대 혜성처럼 등장해 우리 시의 근대를 기적적으로 이뤘다. 하지만 민족의식이 강한 서북지방 출신이다.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기리는 ‘제이 엠 에스(JMS, 조만식의 이니셜)’라는 시를 쓸 정도였다. 그러나 섬세했지 당찬 사람은 아니어서 연시처럼 은유적으로 쓴 것이다.”
 
민족시인 고은다운 독법인 것 같다.
“외국 나가면 나를 민족시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두 들으니까 부자연스럽지 않지만 이제는 지친다. 그런 이름은 내려놔야지….”
지난 세월을 회고한 시가 많다.
“회고는 반드시 현재화되어야 한다.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회고는 내 운명에 없다. 기억도 상상이 개입되어야 하고, 상상 역시 어떤 체험이나 타자의 경험, 흔적들, 인류학적 화석이나 족적 같은 것들이 들어 있어야 한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무한히 과거에 닿아 있고, 아직 만나지 못한 미래에 분명히 닿아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시간만을 긍정할 수는 없다. 무수히 많은 복수의 시간 중에 하필 지금에 내가 우연히 꽂혀 있는 거다.”
시집에서 다룬 죽음 이외의 관심사는.
“한 손가락으로 짚어서 이거다 하는 건 없다. 나는 항상 나침반처럼 떤다. 어디에 내 방위를 설정해야 할지 잘 모른다.”
광교산 자락으로 이사온 게 3년 전이다.
“예전에는 마시면 바로 신호가 오는 소주·보드카를 좋아했는데 여기 와서 잘 빚은 가양주를 마시며 막걸리 맛이 돌아왔다. 할아버지 밥상에서 맛봤던 조상들 술의 진미를 느낀다. 막걸리를 마시면 한 번도 뵌 적 없는 증조할아버지, 고향 산천 어딘가를 살다 갔던 사람들과 실제로 수작(酬酌)을 하는 것 같다. 나는 굉장히 작은데 내 등 뒤에 누적된 조상의 정서를 생각하면 나는 작지 않 다. 더 이상 폭음은 하지 않는다. 천천히 몇십 잔 기울이면 어 좋지~.”
기사 이미지

원고, 필기도구로 가득한 집필실 책상.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막걸리도 수십 잔이면 폭음이다.
“폭음은 속도가 폭음이지. 천천히 마시면 유장하다. 완행열차 가듯 쭉 마신다. TGV(테제베)처럼 가면 술맛 안 난다.”
30권짜리 『만인보』를 포함해 지금까지 시집만 80권 가까이 냈다. 동어반복을 어떻게 피하나.
“시 한 편, 시집 한 권을 내고 나서 바로 나를 떠난다. 백지가 된다. 항상 시 쓸 때 내가 최초의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짤막한 한두 편을 빼고 내 시를 외우는 게 없다.”
다른 시인들은 그렇게 못하는 걸까.
“내 운명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누구와 유비(類比)가 될지 모르겠다.”
한국 시사(詩史)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까.
“시사는 시에 대한 모독일 거다. 시가 다 끝난 뒤 역사화하는 거 아닌가. 그건 일종의 지옥이다. 나는 아직 그 시사 속에 있고 싶지 않다. 그런 무덤 속에 왜 들어가나.”
올해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다.
“그거는 대답 없는 질문 아뇨, 허허. 김소월 시에도 있잖아.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대답 없는 질문이라니까….”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