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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배우 박상원이 한쪽 눈을 찡그리고 세상을 보는 이유

중앙일보 2016.10.1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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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배우 박상원의 사진전 소식을 전해 들었다.
옳다구나 싶었다.
배우가 아닌 사진작가로서 박상원이 궁금했던 터였다.

2008년 그의 사진을 본 적 있었다.
인사동을 지나며 우연히 들른 관훈갤러리에서였다.
고백하자면 별 기대 없이 들린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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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sang won 2006 CANADA, VANCOUVER DOWNTOWN 1

그런데 그의 사진들이 내게 말을 걸어 왔다.
전시 제목이 ‘A MONOLOGUE(모놀로그)’였다.
제목처럼 사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한동안 머물렀었다.
배우 박상원이 아니라 사진작가 박상원의 사진 독백이었다.
그날 난 그의 이름 앞에 ‘사진작가’란 타이틀을 각인해두었다.

그 후 무려 8년 만에 지인을 통해 그의 전시 소식을 접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 본 사진들 중 몇 장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뒷담화가 연재되는 오늘이 그의 전시 시작이었다.
게다가 하필 전시장이 부산이었다.
부산까지 가서 볼 수도 없는 상황이라 급히 만나자고 요청을 했다.
어렵사리 시간을 낸 그를 지난 금요일에 만났다.

우리나라 역대 드라마 시청률 TOP 10중 4 작품,
즉 ‘모래 시계’ ‘여명의 눈동자’ ‘그대 그리고 나’ ‘첫사랑’의 주연을 맡았던 그다.
그러니 배우로서 박상원은 다들 아실 터다.
배우로서 이력이 그토록 화려하니 사진작가로서 박상원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래서 대뜸 마주하자마자 사진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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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sang won 2007 KOREA, SEOUL NAM MOUNTAIN 1]

“사진은 언제부터 찍었습니까?”
“중학생 때 누나가 외국에서 사온 캐논AE-1 카메라를 뺏다시피 해서 손에 넣었습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본격적으로 찍었습니다. 사진학과에 가고 싶었죠. 이런저런 사정으로 못 갔습니다만 대학 땐 ‘예영회’란 사진 서클을 만들어 활동했고요, 제 주위 사람들을 다 찍고 다녔습니다. 결혼식, 행사 가릴 것 없이 찍었죠. 연예인이 되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저를 향하니 더 이상 그런 사진은 못 찍겠더라고요. 그래서 카메라의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죠.”

그의 나이를 가늠해 볼 때 자그마치 40년 이상 사진을 찍어 왔다는 얘기였다.
오래전 별 기대 없이 우연히 본 전시에서 적잖이 놀랐던 까닭이 짐작되었다.

“그 누구보다 바쁘게 살지 않았습니까?”
“항상 카메라를 손에 달고 다녔습니다. 심지어 드라마, 연극을 할 땐 관련 사진을 시간 날 때마다 다 찍었습니다. 아카이브가 될 정도로 찍었습니다. 석사논문도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백스테이지를 2년동안 찍어서 완성했습니다. 분장하고, 잠자고, 라면 먹는 모습들, 배우 박상원이 아니면 못 찍는 거죠.”
“배우 박상원이 아니면 못 찍는 거죠”라는 말끝에 그가 웃었다.
그 웃음에 그만의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배우로서 자신의 삶과 동행하며 찍어 온 그 사진이 보고 싶었다.
사진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간 그가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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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sang won

인터뷰 중 ”박상원에게 사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했다.
이메일로 온 사진은 그의 답과 맥이 통하는 사진이었다.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시간의 정직한 기록이 강점이죠. 우리가 흔히 봐왔던 5, 60년대의 장날, 선거벽보, 동네 풍경의 기록들에 시간이 덧붙여지면 예술로서의 가치를 가지게 되지 않습니까.”

“역사의 기록자가 되고 싶은 겁니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번에 사진전의 제목이 ‘박상원이 꿈꾸는 사진이야기’입니다. 제가 보는 사물의 관점을 박상원 만의 언어로 이야기 하고 싶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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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sang won

“사실 학부에서는 연극을 공부했는데 석사와 박사과정은 사진을 택했잖아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사실 주변에서 말들이 많았죠. 연극관련 공부를 계속해야 입지가 탄탄할 텐데 웬 사진이냐는 이야기였죠. 고민도 했었습니다. 오래전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술학과나 사진학과를 못 간 아쉬움이 있었죠. 사진에 대해 아는 연기자가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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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전 수익을 다 기부한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첫 번째 전시는 월드비젼, 다일공동체, 한국근육병재단에 각 5천만원씩 했습니다. 두 번째는 세 단체는 물론이고 라파엘클리닉에도 기부했습니다. 이번 전시는 다일공동체에 기부할 겁니다.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 비젼센타를 건립하는데 보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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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하는 이유는 뭡니까?”
“제가 사랑을 받았으니 그만큼 돌려줘야죠. 덧칠해서 돈 벌어, 먹고 살면 교만이자 탐욕이 아닐까요? 두 번째 달란트는 평생 이렇게 사치스럽게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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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한 사치는 기부였다.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무엇인지 그에게 물었다.
사실 자신의 아픔을 아는 사람이 남의 아픔을 돌보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그래서 던진 물음이었다.
그런데 없다며 싱겁게 답했다.
그럴 리 없을 텐데 그렇게 말했다.

사실 배우로서도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
그는 그조차도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것도 49% 혹은 51%의 운이라고 했다.
과연 운 만이었을까?

그는 햄릿의 대사 ‘TO BE OR NOT TO BE’를 품고 산다고 했었다.
그러면서 그것을 “인생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의역해서 품고 산다고 했다.

이것으로 판단컨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살아왔을 이유가 있을 듯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물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진학과를 못 갔다고 했는데 그 이런저런 이유가 뭡니까?”

평생 카메라를 끼고 살았으며 석사와 박사 과정도 사진을 택할 정도이니 이 물음에 답이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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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입을 다물고 빙긋이 미소만 띠고 있었다
기다렸다.
꽤 긴 침묵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중고등학교 때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졌습니다. 아버님이 공원에서 자판을 놓고 물건을 팔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매점을 하며 수학여행 온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기도 했구요, 저도 그 일을 거들어야 했죠. 아버님이 중1 때 돌아가시고 나니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못되었습니다. 자아가 작용하지 않는 시절이었습니다. 사진학과에 갈 수 있는 자격이 못되었습니다. 연극은 내 몸으로 흉내만 잘 내면 입학 할 수 있었잖아요. 그래서 이 길로 들어섰죠. ‘이게 세상의 전부다’라고 생각하며 죽어라 했었죠.“

어린 시절의 꿈이었으나 못 이룬 꿈이 사진이었다는 이야기였다.
죽어라 해서 대배우가 되었어도 떨치지 못한 사진이 박상원의 삶과 내내 동행을 하게 된 이유였다.

그의 첫 번째 사진집 서문에 이런 글이 있었다.
'어쩌면! 나의 사진은 혼자 소리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사진은 연기 입니다. 찡그리고 바라보는 또 하나의 장면인 것입니다. 그 속에서 혼자 소리고 치열하게 노는 겁니다. 사진적 상상과 창조적 망상으로 혼돈스럽게 뛰어 노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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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얼굴로 살아온 배우 박상원의 얼굴에 또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그것은 찡그리고 한쪽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진작가 박상원의 얼굴이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박상원이 꿈꾸는 사진이야기’ 전시는 부산의 ‘갤러리아리랑’에서 10월10일(월)~11월 11일(금)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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