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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시시각각] 제복을 존중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

중앙일보 2016.10.09 19:42 종합 30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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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영결식이 끝나고 닷새 뒤에야 링스 헬기 사고 희생자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김혁수 예비역 제독이 ‘훌륭한 링스 사고 유가족’이란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때문이다. 뒷북을 치는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김 제독은 “유가족 누구도 소리 내 울거나 해군에 떼를 쓰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1030m 수심에서 아들 시신을 찾아준 해군에 고마워했다”고 소개했다. 슬픔과 분노는 안으로 끌어안을 때 더 거룩하고 숙연해진다.

두 장면을 소개하고 싶다. 하나는 미국 영화 ‘챈스 일병의 귀환’. 이라크에서 전사한 19세 챈스 일병의 유해 운구 과정을 다룬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델라웨어 군 영안실에 도착한 시신이 고향 와이오밍주까지 가는 3000㎞의 행로를 담고 있다. 영화에는 대사가 거의 없다. 반전이나 애국의 가치 판단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조국의 명에 따른 전사자를 향한 미국인들의 고마움과 미안함을 그릴 뿐이다. 2009년 미 HBO의 첫 방영 때 200만 명이 봤으나 재방송 땐 무려 500만 명이 시청했다. 입소문 하나로 역대급 시청률 역(逆)주행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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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서 기장은 공항에 착륙할 무렵 기내 방송을 한다. “우리는 해병 전사자 유해와 함께 비행하는 영광을 누렸다. 운구를 위해 잠시 자리에 머물러 달라.” 승객들은 저마다 옷깃을 여미며 한참을 기다린다. 그리고 유해가 옮겨지는 광경을 엄숙하게 지켜본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몬태나에서 와이오밍으로 가는 육로 이송이다. 운구차가 황야의 도로를 달릴 때 민간인 차량들이 미군 전사자 유해가 실렸음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호송대열에 동참한다. 트레일러가 맨 앞에서 길을 열고 다른 민간 차량들은 예의를 표시하는 라이트를 켠 채 묵묵히 꼬리를 물며 뒤따른다. 텅 빈 도로에 누구도 추월하지 않는다(사진 위).

또 하나, 2012년 10월 29일의 사진도 기억에 남는다. 사상 최악의 허리케인인 ‘샌디’가 미국 버지니아주를 덮친 그날, 워싱턴의 알링턴 묘지에서 병사들이 무명용사의 묘를 지키는 사진이 혼돈을 가라앉혔다(사진 아래). 살인적 폭풍우 속에서도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장면이다. 이 부대는 그 밑에 ‘우리는 1948년 4월 1일부터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비와 바람과 눈과 태풍에도 이 묘지를 지키고 있다’고 썼다(사실은 그해 9월 폭풍우 때 찍은 사진이 공교롭게 샌디 상륙 무렵 인터넷에 확산됐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부터 이 사진에 자극받았을까. 줄곧 백악관 상황실을 지키며 샌디에 성공적으로 대처한 것이 재선의 원동력이 됐다.

어디 미국뿐이랴.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무명용사 묘지에는 횃불이 타고 있다. 한번도 꺼진 적이 없다. 이 묘지는 결혼식을 마친 러시아 신혼부부들이 가장 먼저 찾는 장소다. 영국의 웨스터민스터 사원에는 왕을 비롯한 역대 영웅 3000여 명이 잠들어 있다. 하지만 가장 성스러운 곳은 제1차 세계대전 전사자를 안치한 정문 바닥의 ‘무명용사 묘’다. 이 무덤은 방문객들이 유일하게 못 밟는 성역이자 가장 소중한 꽃을 바치는 성지다. 윌리엄 왕세손의 부인 케이트 미들턴도 자신의 결혼식 화환을 여기에 바쳤다. 강대국들의 공통분모다.

미국은 향군성(보훈처)이 두 번째로 큰 부처다. 전사자 유가족도 ‘골드 스타 패밀리스(Gold Star families)’라며 떠받든다. 이에 비해 한국의 한 대통령은 군 복무를 ‘썩는다’고 했다. 우리는 여전히 ‘군바리’ ‘땅개’ ‘짭새’라 비아냥거리고, ‘군대에서 죽으면 개값’이라 수군거린다. 하지만 이번 태풍에도 발목이 부러졌지만 구조 밧줄을 놓지 않은 해경, 긴급 출동했다가 급류에 희생된 젊은 소방대원이 있었다. 끝까지 제자리를 지키는 제복 차림의 군인·경찰·소방관들…. 이들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한국이 바로설지 의문이다. 뒤늦었지만 링스 헬기 희생자들의 영면을 기원한다.

이철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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