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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몽골제국 중 유일하게 국가 유지

중앙선데이 2016.10.09 01:57 500호 1면 지면보기
【총평】



무신 정변으로 문벌 귀족 사회가 무너지고 무신 정권이 들어선 뒤인 13세기 초에 동아시아 정세는 크게 변화하였다.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금을 공격하여 북중국을 점령했다. 이 무렵 몽골에 쫓긴 거란족 일부가 고려로 침입해 들어오자 고려는 거란족을 추격해 온 몽골과 함께 거란족을 토벌했다. 이후 몽골은 자신들이 거란족을 몰아내 준 은인이라고 자처하며 고려에 막대한 공물을 요구해 왔다. 마침 고려에 왔던 몽골 사신 저고여가 귀국하던 길에 국경 지대에서 피살되자, 이를 구실로 몽골군은 고려에 침입하였다(1231).?


-65- 몽골과 고려

몽골군은 귀주성에서 박서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길을 돌려 개경을 포위하였다. 이에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몽골군도 큰 소득 없이 물러갔다. 무신 정권의 집권자 최우는 몽골의 무리한 조공 요구와 간섭에 맞서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위한 방비를 강화했다.



몽골이 다시 침입해 왔으나 이에 맞서 노비, 부곡민 등 하층 민중도 적극 항전했다. 처인성 전투에서 승려 김윤후가 부곡민들과 합세하여 몽골 장수 살리타를 사살하고 몽골군을 퇴각시키는 큰 전과를 올렸다.



몽골군은 강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고려에 침입하였고, 고려는 몽골의 침략에 끈질기게 막아냈다.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키고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국토가 황폐해졌으며, 백성은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한편, 지배층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조판했다.

팔만대장경(경남 합천 해인사)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일반 민중이 용감하게 대항하였기 때문이었다. 충주성에서는 다인철소의 주민들이 힘을 합쳐 몽골군을 물리쳤는데, 그 공으로 다인철소는 익안현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강화도의 고려 정부는 수로를 통해 조세를 거두어들여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황룡사 9층 목탑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도 소실되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몽골과 강화를 맺으려는 주화파가 득세하면서 결국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전쟁은 끝이 났다.



고려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오랫동안 항쟁한 결과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몽골이 고려와 강화를 맺고 고려의 주권과 고유한 풍속을 인정한 것은 고려를 직속령으로 완전히 정복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고려의 끈질긴 항전의 결과였다.



원 세조(쿠빌라이 칸)는 고려가 요구했던 내용을 수락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양국 관계를 제시하였다. 이 때 세조가 약속한 것을 ‘세조 구제’라 한다.

첫째, 옷과 머리에 쓰는 관은 고려의 풍속에 따라 바꿀 필요가 없다.

둘째, 사신은 오직 원 조정이 보내는 것 이외에 모두 금지한다.

셋째, 개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고려 조정에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

넷째, 압록강 둔전과 군대는 가을에 철수한다.

다섯째, 전에 보낸 다루가치는 모두 철수한다.

여섯째, 몽골에 자원해 머무른 사람들은 조사하여 돌려보낸다.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1270), 대몽 항전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이에 반기를 들고 배중손의 지휘 아래 항전을 계속했다. 삼별초는 최우가 집권하면서 설치한 야별초라는 군대에서 분리된 좌별초, 우별초와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해 온 병사들로 조직된 신의군을 합친 군대를 말한다.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항몽 정권을 수립했다. 몽골과 고려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도가 함락되자(1271) 다시 제주도로 가서 김통정의 지휘 아래항전을 계속했다. 삼별초의 장기적인 항쟁이 가능하였던 것은 몽골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리적 이점과 몽골에 굴복하는 것에 반발하는 일반 민중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첩장 불심조조’ (도쿄 대학교 사료 편찬소) ⓒ2005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첩장 불심조조’는 1271년 삼별초 정부가 일본에 보내 몽고와 함께 싸울 것을 제안한 문서이다. 1271년 진도에 있던 삼별초가 보낸 외교 문서를 일본이 3년 전에 원종이 보낸 국서와 비교하여 이해가 안 되거나 불확실한 부분을 정리한 것이다. 몽골이 일본을 공격할 가능성과 연대의 필요성, 군사적 지원 요청을 담고 있다.



몽골과 강화한 이후, 고려는 먼저 몽골의 일본 원정에 동원되었다. 몽골은 국호를 원으로 바꾼 뒤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을 단행하면서 고려로부터 선박, 식량, 무기를 비롯한 전쟁 물자와 함께 군대와 선원 등 인적 자원도 징발했다. 두 차례에 걸친 원정은 태풍으로 실패했고, 엄청난 인력과 물자를 동원해야 했던 고려는 큰 손실 입었다.



오랜 전란에 시달린 고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여.몽 연합군의 1차 원정(1274)이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저항과 태풍으로 실패한 뒤 원은 개경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2차 원정을 준비했으나 2차 원정 역시 실패했다.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 (‘몽고습래회사’, 일본 궁내청 소장) (*출처 : 천재교육 한국사)



일본은 여.몽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과도한 군비 지출 등으로 가마쿠라 막부가 붕괴되었다.?



원은 고종 말년에 화주(영흥)에 쌍성 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을 직속령으로 편입하였고, 자비령 이북을 차지하여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했다. 또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한 뒤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을 경영했다.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는 충렬왕 때 다시 찾았으나, 쌍성총관부는 공민왕이 무력으로 회복할 때까지 원의 지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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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오랜 항쟁의 결과, 원에 정복당한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고려 국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은 부마국에 맞는 것으로 바뀌었다. 원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묘호 앞에 충(忠)자를 붙이고, 조.종을 왕으로 격하했다. 아울러 관제도 개편되고 격도 낮아졌다.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은 첨의부로 합쳐지고, 중추원은 밀직사로, 6부는 4사로 개편되었다.



원은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설치했던 정동행성을 계속 유지하여 내정 간섭 기구로 삼았다. 군사적으로는 만호부를 설치하여 고려의 군사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다루가치라는 감찰관을 파견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한편, 원은 금, 은, 베를 비롯하여 인삼, 약재, 매 등의 특산물을 징발하여 농민의 고통을 가중했다. 고려는 매를 징발하기 위해 응방이라는 특수 기관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러한 원의 내정간섭과 경제적인 수탈은 고려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우선 자주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원의 압력과 친원파의 책동 때문에 고려 정치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왕권이 원에 의지하여 유지됨은 물론이고 통치 질서가 무너져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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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키워드】



☞ 몽골 사신 피살을 구실로 [몽골군은 고려에 침입하였다(1231)]. 몽골군은 [귀주성]에서 [박서]의 저항에 부딪히자 길을 돌려 개경을 포위하였다. [최우]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위한 방비를 강화했다. [처인성 전투]에서 승려 [김윤후]가 부곡민들과 합세하여 몽골 장수 [살리타]를 사살하고 몽골군을 퇴각시키는 큰 전과를 올렸다. [충주성]에서는 [다인철소]의 주민들이 몽골군을 물리쳤다. [개경으로 환도]하자(1270), [삼별초]는 반기를 들고 [배중손]의 지휘 아래 항전을 계속했다.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항몽 정권]을 수립했다. 진도가 함락되자(1271) [제주도로 가서 김통정의 지휘 아래 항전을 계속]했다.



[여.몽 연합군의 1차 원정(1274)]이 실패한 뒤 원은 개경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2차 원정을 준비했으나 2차 원정 역시 실패했다. 원은 화주(영흥)에 [쌍성 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을 직속령으로 편입하였고, 자비령 이북을 차지하여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했다.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했다.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원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묘호 앞에 [충(忠)]자를 붙이고, 조.종을 [왕으로 격하]했다. 아울러 [관제도 개편]되고 [격도 낮아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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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문제와 해설 】



1. 다음과 같은 상황이 나타났던 시기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이곡이 상소를 올렸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곧 감추고, 오직 탄로날 것을 우려하여 이웃 사람들도 볼 수 없게 한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우리 백성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무엇 때문에 왔을까, 처녀를 잡으러 온 것은 아닌가?’라고 걱정합니다. … (중략) … 이런 일이 일년에 한두 번이나 2년에 한 번씩 있는데, 그 수가 많을 때는 40~50명에 이릅니다. 만약 거기에 뽑히게 되면, 그 부모나 일가친척들이 서로 모여 밤낮으로 슬피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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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부마국 지위에 맞춰 왕실의 호칭과 관제가 바뀌었다.



② 매를 징발하기 위한 특수 기관으로 응방이 설치되었다.



③ 고려의 의복, 그릇, 음식 등의 풍습이 몽골에 전해졌다.,



④ 지배층은 농장을 확대하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았다.



⑤ 무늬를 다양하고 화려하게 넣은 상감청자가 전성기를 이루었다.?

* 2012학년도 6월 모의평가 6번

?해설 : 정답 ⑤

제시문은 원이 공녀를 강제로 징발해가는 상황에 대해 반발하여 올라온 원 간섭기의 상소이다.

⑤ 상감청자는 원 간섭기 이후 퇴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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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음 풍속이 나타난 시기의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임금의 음식을 가리키는 ‘수라’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으며 증류 방식의 술인 소주가 도입되었다. 남자들 사이에 머리 뒷부분만 남겨놓고 주변의 머리털을 깎아 나머지 모발을 땋아서 등 뒤로 늘어뜨리는 머리 스타일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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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다루가치가 파견되어 내정을 간섭하였다.



② 매의 사육을 담당하는 응방이 설치되었다.



③ 집정부의 구실을 하는 교정 도감이 설치되었다.



④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로 하였다.



⑤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마국에 걸맞게 바뀌었다.

* 2013학년도 6월 모의평가 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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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정답 ③

제시문은 몽골풍이 전래된 고려의 사회에 대한 내용이다.

③ 교정도감은 무신 정권 최고 권력기구였다. 도방 강화는 최씨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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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음 왕의 정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왕이 교지를 내려, “기철 등이 나라의 법도를 흔들고 관리의 임용도 마음대로 하였다. 이제 다행히 간악한 반역의 무리 기철 등을 나라의 떳떳한 법으로 처단하였다. 이제부터는 법령과 기강을 정돈하여 온 나라 사람이 모두 함께 새로이 출발할 것을 기약하노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원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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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정방을 혁파하였다.



②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③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였다.



④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였다.



⑤ 중서문하성 등 옛 관제를 복구하였다.?

* 2016학년도 6월 모의평가 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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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정답 ②

제시문은 기철 등 친원파를 숙청하고, 원의 연호를 폐지하는 등 반원 정책을 폈던 고려 공민왕의 대의 내용이다.

② 몽골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한 왕은 고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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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음 자료의 왕이 실시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왕 대 주요 정책

1년 1월 변바과 호복금지

1년 2월 정방 폐지

… (중략) …

5년 5월 기철 등 친원 세력 숙청

5년 7월 옛 관제 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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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몽골의 침입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② 왕권 강화를 위하여 관거 제도를 도입하였다.



③ 호족을 견제하기 위하여 기인 제도를 시행하였다.



④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⑤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다.?

* 2014학년도 수능 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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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풍을 금지하고, 정방을 폐지하고, 친원파를 숙청하고 옛 관제 복구한 왕은 공민왕이다.

해설 : 정답 ⑤

⑤ 공민왕의 반원 정책 5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기철 등 친원파 숙청, 2.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3. 쌍성총관부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 수복, 4. 광제 복구, 5. 몽골풍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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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밑줄 친 ‘새로운 세력’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공민왕의 개혁 과정에서 새로운 세력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들은 신분상으로 지방 향리 출신이 많았으며 경제적으로는 중소 지주가 대부분이었다. 주로 과거를 통하여 관리가 되었으며, 불교의 폐단을 비롯한 고려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정치와 제도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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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친원적 성향이 강하였다.



② 골품제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③ 성리학을 학문적 기반으로 하였다.



④ 중방을 통하여 권력을 독점하였다.



⑤ 녹읍을 통해 경제적 지위를 세습하였다.

* 2014년 6월 학력평가 1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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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정답 ③

제시문은 공민왕 때 왕권 강화를 위해 등용된 신진 사대부에 대한 설명이다.

③ 고려 말 성장한 신진사대부의 특징으로는 공민왕의 개혁 과정에서 성장했다는 점, 반원적 성격이 있다는 점, 무신 집권기 이후 등장했다는 점, 지방의 향리나 하급 관리 출신이 많다는 점,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한 점, 학문적 기반이 성리학이라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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