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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은 하는 리더십, 반기문의 유엔과 ‘완전한 결별’ 예고

중앙선데이 2016.10.09 01:09 500호 11면 지면보기

로이터=[뉴스1]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뒤를 이을 새로운 유엔 수장이 탄생했다. 안토니우 구테헤스(67·사진) 전 포르투갈 총리다.


새 유엔 사무총장 구테헤스 전 포르투갈 총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구테헤스 전 총리를 차기 유엔 사무총장으로 유엔 총회에 추천키로 합의한 5일(현지시간) 뉴욕 유엔본부에선 진풍경이 벌어졌다. 안보리 이사국 15개국 대표가 안보리 회의장 바깥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의 마이크 앞에 도열했다. 회의장에서 으르렁거리다가 회의가 끝나면 뿔뿔이 흩어지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안보리가 구테헤스를 강력하게 지지한다는 상징적 제스처였다. 구테헤스에 대한 유엔 총회 표결은 형식에 불과할 전망이다. 구테헤스는 반 총장이 물러나는 내년 1월부터 5년간 지구촌 최대 국제기구인 유엔을 이끌게 된다.



구테헤스를 선출한 것은 이변이라면 이변이다. 역대 사무총장 선출 때 적용돼 온 지역 안배에 따르면 이번 사무총장은 동유럽에서 배출할 차례였다. 여기에 여성 사무총장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가세했다. 유엔 193개 회원국 가운데 3분의 1 정도가 여성 총장을 선호할 정도였다. 뛰어난 여성 후보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불가리아 출신의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 부위원장과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 헬렌 클라크 전 뉴질랜드 총리 등 면면이 쟁쟁했다.



그러나 유엔 사무총장 선출은 강대국들의 이익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국제정치의 진검승부다. 미국·러시아·중국·영국·프랑스 등 5개 상임이사국은 자신들의 이해와 상충하는 인물에겐 거부권을 행사한다. 구테헤스만 해도 마지막까지 2장의 반대 표(비권장)가 따라붙었다. 유엔 외교가에선 동유럽 출신 후보를 원하는 러시아와 중국이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갑작스러운 안보리의 만장일치 추대에 일종의 뒷거래가 있지 않느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증거는 없다. 안보리 10월 의장국인 러시아의 비탈리 추르킨 유엔 대사는 “테이블 밑에서 어떤 거래도 없었다”고 말했다. 러시아와 중국이 어떤 이익을 관철했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어쨌든 구테헤스는 동유럽 출신 여성 인사를 부총장 자리에 앉힐 것으로 예상된다.

2011년 7월 케냐의 소말리아 난민 캠프를 찾은 쿠테헤스 당시 유엔난민기구 최고대표. [AP=뉴시스]



구테헤스가 자질 면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반론이 없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난민 문제 전문가다. 2005~2015년 10년간 유엔난민기구(UNHCR) 최고대표를 지내며 ‘난민의 대부’란 별칭을 얻었다. 난민 문제가 지구촌 최대 이슈인 시기에 그가 유엔 사무총장으로 뽑힌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유례없이 난민이 급증하던 시기에 UNHCR을 이끌었다. 인력과 예산은 늘 부족했다. 그는 제네바의 본부조직을 절반 가까이 줄여 난민들이 애타게 구호를 기다리는 현장으로 내보냈다.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서 태어난 구테헤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평소 “살기 위해 도망 나오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다. 우리의 선택은 오직 난민의 도착을 어떻게 잘 인간적으로 다루느냐는 것뿐”이라고 주장해 왔다. 유엔의 난민정책이 적극적 개입으로 선회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구테헤스는 선진국들에 보다 많은 난민을 받아들이고, 난민들에 대한 지원을 더 늘리도록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역대 사무총장과 구테헤스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가 외교관이 아니라 정치인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대학에서 물리학과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물리학 박사를 꿈꿨던 그는 대학 시절 빈민가 봉사 경험을 계기로 진로를 바꿨다. 대학 졸업 후 사회당에 입당해 21년 만에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는 8년간(1995~2002년) 포르투갈 총리를 지내며 포르투갈 총리의 최정점에 머물렀다. 그는 현실정치에서 대화와 협상, 설득과 압박이라는 자산을 체득했다. 추르킨 유엔 대사는 구테헤스의 장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모든 사람에게 말하고 귀 기울일 줄 아는 개방적 인물”이라고 대답했다.



구테헤스가 이끄는 유엔은 반 총장의 유엔과는 확연히 다를 전망이다. 외신에선 ‘완전한 결별(clean break)’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반 총장은 무대 뒤에서 조용히 컨센서스를 도출해 나가는 방식을 선호한다. 그의 조용한 리더십이 파리기후변화협정과 지속가능개발목표(SDGs) 같은 어려운 합의를 도출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엔 이견이 없다. 그러나 강대국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같은 독재자들을 다루는 카리스마와 노련함이 부족했다는 혹평이 따라다닌다. 유엔 총장에겐 ‘도덕적 권위’가 힘인데 그 힘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 구테헤스는 ‘할 말은 하는’ 스타일이다. 그는 영어는 물론 불어와 스페인어에 두루 능하다. 구테헤스는 UNHCR 최고대표 시절 시리아 난민들의 정착을 적극 지원하지 않는다며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대놓고 비판했다. 베이징(北京)을 방문해 탈북자 강제송환은 국제법에 어긋난다며 중국 정부를 몰아붙이기도 했다.



구테헤스가 마주하게 될 국제질서는 녹록지 않다. 무엇보다 미국과 러시아 등 강대국 간에 벌어지고 있는 신냉전은 유엔의 입지를 좁히고 있다.



구테헤스의 조국 포르투갈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창립국이다. 그는 포르투갈의 유로화 사용을 진두 지휘했을 정도로 적극적인 유럽연합(EU) 통합론자다. 러시아와 중국은 구테헤스의 유엔에 대한 견제 수위를 높일 것이다.



구테헤스에겐 벌써 산적한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분쟁과 테러, 북한의 핵 개발 등 세계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독버섯이 도처에서 자라고 있다. 어린이와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있는 시리아내전의 종식은 구테헤스의 역량을 가늠하는 첫 번째 시험대가 될 것이다.



유엔 안보리와 사무국의 개혁도 미룰 수 없는 숙제다. 유엔의 핵심인 안보리는 5개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에 인질로 잡힌 지 오래다. 미국과 러시아 등이 번갈아 가며 거부권을 행사하는 가운데 유엔은 민간인 대량 학살조차 막지 못하는 식물기구로 전락하고 있다.



사무국엔 관료주의가 만연해 있다. 인력 채용엔 평균 213일이 걸릴 정도다. 평화유지군은 주둔지에서 성폭행을 자행해 공분을 사고 있다.



유엔에 대한 세계 시민의 좌절감은 깊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유엔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구테헤스는 성공한 유엔 사무총장이 될 수 있을까. 그가 내놓은 첫 소감에 답이 있을지 모른다. 그는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제일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말했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i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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