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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2035] 사랑하는 사람을 왜 숨겨야 하나요

중앙일보 2016.10.07 00:22 종합 3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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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미
JTBC 정치부 기자

“우선 카톡 프로필 아기 사진부터 지워.” 출산휴가 후 복직한 A에게 회사 선배가 던진 충고는 이랬다. A의 카톡 프로필 사진엔 아들이 웃고 있었다. ‘신문사 사회부 기자’라는 소개와 함께. 많은 업무가 카톡으로 이뤄지는데, 수시로 애 엄마인 걸 알릴 필요는 없다는 얘기였다. “일은 똑같이 하면서 괜히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는 소리 들을 필요는 없잖아.” A는 사랑하는 아들이 순식간에 콩밭이 됐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을 욕할 일도 아니다. “신랑이에요? 신혼인가봐, 좋을 때네.” 한 취재원이 내 휴대전화를 보며 무심코 던진 말에 나는 초기화면에서 남편의 사진을 슬그머니 지웠다. 대신 흔해빠진 산과 강 사진으로 그 자리를 채웠다. 새로운 부서로 옮긴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혹시 누군가 일을 잘하지 못하는 게, 빠르게 처리하지 못하는 게 나의 ‘콩밭’ 탓이라 생각할까 두려웠다.

나라 밖은 다르다. 미국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오히려 사랑을 보여주지 못해 안달이 났다. 남편 빌 클린턴과 딸 첼시 클린턴은 지지연설 때마다 힐러리를 유능한 정치인보다는 “나의 사랑하는 한 여자”로, “손녀의 재롱에 푹 빠진 할머니”로 소개했다. 그리고 그게 먹혔다. 정치평론가들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미국인들의 가치를 지켜줄 거라는 믿음”이라고 분석했다.

얼마 전 김진태 의원이 제기한 ‘발리 여행’ 논란을 지켜보며 나는 그 차이를 절감했다. 그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고(故) 백남기씨는 의료진이 치료를 권했으나 가족이 적극적인 치료를 원하지 않아 사망한 것”이라면서 “이때 백씨의 딸은 인도네시아 발리 여행 중이었다”고 폭로했다. 그게 어쨌다는 건지. 자식도 생활도 내팽개쳐야 진정성을 인정할 수 있단 얘긴가. 

딸 백민주화씨는 “저는 고생한 아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주고픈 엄마이기도 합니다. 24시간 대기해야 하는 것이 백남기 딸의 조건이라면 저를 불효자라 불러주세요”라고 했다. 가족 휴가 사진과 위치를 숨겼다는 의혹에는 이런 답을 덧붙였다. “왜 숨기나요, 그걸.” 나는 백민주화씨가 300일이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A는 지금까지 프로필 사진을 바꾸지 않고 있다. 오히려 아기를 볼 때마다 일을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좋은 기사를 쓰면 아이들이 맞이하는 세상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겠느냐며. 딸에게 유산 대신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어 페이스북 주식의 99%를 내놓겠다는 저커버그만 대단한 게 아니다.

김혜미 JTBC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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