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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불안과 공허를 끌어안은 이와이 슌지 감독의 새로운 뮤즈

중앙일보 2016.10.07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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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반윙클의 신부. [사진 영화사 제공]

“척 보기에 굉장히 아름다운데, 보고 있으면 그 슬픔이 가슴에 콕콕 박힐 정도로 아련한 감성, 그런 얼굴을 포착하시는 것 같아요.” 9월 29일 열린 ‘립반윙클의 신부’(이하 ‘립반’)의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한 배우 임수정이 이와이 슌지 감독에게 건넨 말이다. 여자 배우가 지닌 가장 특별한 매력을 포착하는 감독. 그의 영화 ‘러브레터’와 ‘하나와 앨리스’는 각각 나카야마 미호와 아오이 유우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담은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립반’은? 이와이 감독의 새로운 뮤즈, 쿠로키 하루(26)의 매력을 한껏 뿜어내는 영화다.

‘립반윙클의 신부’ 쿠로키 하루

“영화 냄새가 나는 배우.” 이와이 감독이 쿠로키에게서 받은 인상이다. 대학 시절 연기를 전공하던 쿠로키가 출연한 연극을 보고 그를 기억해 두었던 이와이 감독은, “2012년 한 TV 광고 오디션에서 쿠로키를 다시 만났을 때 압도적인 무언가를 느꼈다”고 밝혔다. 그 ‘압도적인 무언가’의 정체를 ‘립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갸름한 얼굴, 오뚝 솟은 작은 코, 똥그란 눈동자, 뽀얀 살결은 언뜻 ‘릴리 슈슈의 모든 것’과 ‘하나와 앨리스’에서 이와이 감독이 ‘발견’하다시피 한 아오이 유우와 겹쳐 보인다. 그러나 극 중 어색한 상황에 맞닥뜨릴 때마다 나나미가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입꼬리를 뾰족하게 올리며 소리 없이 웃는 순간, 쿠로키만의 매력이 무엇인지 또렷해진다. 삶에 대한 별다른 목표나 고민 없이 살아온 나나미가 당혹감을 감출 때의 그 정갈한 미소, 그와 달리 미세하게 떨리는 눈빛. ‘릴리 슈슈의 모든 것’과 ‘하나와 앨리스’의 아오이가 청순한 생김새를 뚫고 나오는 생기발랄함을 보여 준다면, ‘립반’의 쿠로키는 고요한 미소로 그 아래 숨은 불안과 무력감을 드러낸다. 바로 그것이 이와이 감독이 포착한 지금 일본 사회 젊은이들의 자화상이다. 그 혼돈을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 강렬하게 표현하는 쿠로키의 연기가 예사롭지 않다.

그의 연기는 ‘립반’ 이전에 이미 여러 차례 박수를 받은 바 있다. 가족극과 코미디영화의 거장, 야마다 요지 감독의 ‘작은 집’(2013)으로 제64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여자배우상)을 수상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수십 년 동안 한 가족의 비밀을 지켜보는 가정부 역을 맡아 극의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차분하게 끌어가는 연기를 펼쳤다. 그 밖에도, 뜻하지 않게 사전 편집부로 출근하게 된 신입 사원을 연기한 ‘행복한 사전’(2013, 이시이 유야 감독), 1945년 일본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 당시 죽은 남자의 애인으로 등장하는 판타지 시대극 ‘어머니와 살면’(2015, 야마다 요지 감독) 등으로 일본의 여러 영화상에서 신인배우상과 여우조연상을 휩쓴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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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쇄를 찍자! [사진 영화사 제공]

쿠로키의 ‘폭넓은’ 연기력을 확인하고 싶다면, 얼마 전 방영한 일본 TV 드라마 ‘중쇄를 찍자!’(TBS)를 보면 된다. 만화 주간지 편집부에 취직한 코코로(쿠로키 하루)가 한 주 한 주 마감을 겪으며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다. 여기서 쿠로키는 ‘립반’과 달리 생기발랄하고 귀여운 매력을 유감없이 뽐낸다. ‘립반’의 소리 없는 미소를 넘어, 그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이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으면 이토록 활기 넘치는 얼굴로 변한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이와이 감독이 발견한 무기력한 일본 젊은이들의 자화상, 야마다 감독이 불러낸 전통적인 일본 여인의 아름다움, ‘중쇄를 찍자!’에서 빛난 사랑스럽고 귀여운 매력. 과연 일본의 차세대 연기파 배우 쿠로키의 무지개는 어디까지 뻗어 갈까. 분명한 건, 지금까지는 그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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