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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중앙일보 2016.10.05 19:15 종합 31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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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
논설위원

이 할아버지, 참으로 꼼꼼하다. 충북 충주에 사는 농부 임대규(82)씨 얘기다. 지난 59년 동안 자기 주변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을 깨알같이 적어놓았다. ‘기록의 달인’이란 별명을 붙여도 과장이 아닐 것 같다. 처음에는 작은 노트에, 이후에는 큼직한 달력에 그날그날의 일을 옮겨 적었다. “기록은 모두 역사다” “기록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라는 소신에서 좋아하던 술과 담배도 끊었다고 한다.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기록광’ 임씨의 면모가 박물관 안으로 들어왔다.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노인-오랜 경험, 깊은 지혜’ 특별전(11월 8일까지)에서다. 글과 그림이 있는 영농일지는 기본이다. 그는 아들과 딸이 준 용돈과 선물도 빼곡하게 적었다. 여행지에서 들른 식당의 명함도 차곡차곡 모았다. 혹시 나중에 배탈이 나면 연락을 하기 위해서다. 명함이 없으면 음식점 나무젓가락 포장지를 챙겼다. 그곳에 전화번호가 있기 때문이다.

기록의 힘은 대단했다. 재판의 증거자료로도 채택됐다. 2006년 6월 7일자 달력에 임씨는 이렇게 적었다. ‘배추장사(가) 작업해놓고 못 가지고 간다고 했음. 시세가 없어서였음’. 이웃집 농부가 키운 배추를 사 가기로 한 중간도매상이 시세가 떨어지자 원래 약속을 지키지 않아 소송이 벌어졌는데 임씨가 적바림한 몇 자가 농부가 승소를 하는 결정적 증거로 활용됐다. 그날을 기억하려는 듯 임씨는 달력에 빨간 스티커를 붙여놓았다.

박물관에는 지난 세월 우리의 얼굴이 켜켜이 쌓여 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망치로 고장 난 시계를 65년간 고쳐 온 오태준(82)씨, 가업을 물려받아 평생을 양복 재단사로 일해 온 이경주(72)씨, 서울 불광동에서 60년 넘게 쇠를 두드려 온 대장장이 박경원(79)씨의 손때 묻은 물품 60여 점이 출품됐다. 각자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온 어르신들의 체취이자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디딤돌이다. 아버지 없는 아들은 세상에 없을 터다.

전시장은 한 편의 대하 다큐멘터리다. 지하철 택배원으로 일하는 조용문(76)씨가 객원 큐레이터로 참여해 현장감을 높였다. ‘노인은 나약한 존재’ ‘노인은 문제덩어리’라는 통념을 보기 좋게 깨뜨린다. 2050년이 되면 인구 10명 중 4명이 노인인 초고령 사회에 접어드는 우리의 선택도 분명해진다. 그들의 경험을 이어받고, 그들이 일어설 자리를 늘려야 내일도 있을 것이다.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도 있다.

박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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