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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민정당 “다른 의견 있을 뿐 틀린 의견은 없다”…야당 평민당 “표결엔 승자·패자 없다, 누구나 승복”

중앙일보 2016.10.03 01:30 종합 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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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5월 30일. 당시 김재순(사진) 국회의장은 여소야대의 13대 국회 개회사에서 “독선과 아집을 버리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고 대화와 타협을 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판국”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후세 사가(史家)들이 4당 병립의 판도야말로 대화정치, 타협정치의 확고한 전통을 세운 황금분할이었다고 기록하도록 서약하자”고 제안했다. 제안은 현실이 됐다. 그 장면은 13대 국회 속기록에 생생히 남아 있다.

1988년 국회 속기록에 담긴 ‘협치 추억’
김재순 국회의장 “4당 병립 판도
대화·타협 정치로 기록되게 하자”
3당 합당 전 여소야대 2년 동안
국감 부활, 의료보험 확대 등 이뤄

88년 7월 9일 국회 본회의. 72년 유신헌법 이래 사라졌던 국정감사를 부활시키기 위한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안’이 표결을 위해 상정됐다.

▶민정당 이진우 의원=“연일 밤을 새우다시피한 토론을 했다. 다른 의견이 있을 뿐 틀린 의견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논의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표결을 하게 돼 송구스럽다.”

▶평민당 신기하 의원=“심혈을 경주했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해 차선의 방법인 표결에 이르게 됐다. 표결을 위해 창출된 과정엔 승자도 패자도 없이 누구라도 (결과에) 승복하는 민주주의의 아름다운 상이 돼야 한다.”

‘다른 의견’은 ‘틀린 의견’으로 몰아세우고 ‘표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지금의 국회 문화와는 달랐다. 의원들은 기립을 통해 찬반을 표시했다. 재석 291명 중 찬성 164명, 반대 125명, 기권 2명이었다. 여당은 표결에서 패했지만 결과를 수용했다.

13대 국회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5공 청문회장에 세우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재평가했다. 88년 6월 27일 국회 운영위원회. 5공 특위,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 등 8개 특위 구성안이 올라왔다. 광주특위를 제외한 7개 안건의 공동 발의자는 김윤환·김원기·최형우·김용채 등 당시 여야 4당 원내총무(현 원내대표)였다. 사전 협상을 통해 여야가 모든 조율을 마쳤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광주특위 구성안도 전체회의가 열리기 전 위원회 안으로 대체하는 데 여야가 극적으로 합의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89년 10월 13일 본회의에선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출석 문제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5공 특위를 구성한 뒤 전 전 대통령의 출석 없이는 당시 여론을 잠재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여당인 민정당은 끝까지 난색을 표했다. 그러자 야당이었지만 보수당을 표방했던 공화당 이종근 의원이 나섰다.

▶이종근 의원=“민정당 의원 여러분 저 보시오. 평민당, 민주당, 공화당, 우리가 둘러싸주고 있어요. 만일 야 3당이 없었을 때 여러분 혼자 정치할 수 있어요? 5공 청산을 마무리 짓지 않으면 우리 모두 의사당을 나가야 합니다. 아니지요, 내쫓겨야 합니다. 국민들이 몽둥이를 가지고 와서 ‘언제까지 끌고 갈 거냐’며 내쫓을 때 조금 더 하겠다고 말할 사람 있어요?”

13대 국회는 결국 그해 12월 31일 전 전 대통령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이런 협치 문화는 정치의 자양분이 됐다. 신진 정치인들이 협치문화 속에 부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5공 청문회에서 초선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문회 스타’ 대접을 받은 게 대표적이다.

민정당 초선 박희태 의원은 늘 본회의 반대토론의 선봉에 섰다. 그는 야당이 청문회 증인에 대한 강제구인권을 도입하자는 요구를 하자 “증인 소환을 거부할 경우 위원회 결의로 고발하는 조항이 있는데 (야당이) ‘쌍권총’을 차려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당시 ‘쌍권총’은 유행어가 됐고 그는 명대변인이 됐다.

13대 국회는 처음으로 청문회를 도입하고 지방자치법도 제정했다. 국정감사와 의료보험 등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는 주요 정책을 협상을 통해 만들어냈다. 당시 성과의 상당수는 88년부터 2년간 이어졌던 ‘여소야대’ 국면에서 이뤄졌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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