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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시시각각] 한국의 물고기도 머리부터 썩는가

중앙일보 2016.10.02 20:36 종합 2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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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사진 한 장은 소셜네트워크(SNS) 시대에 진실 그 이상을 말해 준다. 지난달 24일 미국의 흑인박물관 개관식 사진이 그중 하나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툭 치며 휴대전화를 건네자 오바마는 기꺼이 사진사가 돼 주었다. 이 사진 한 장에 공화당과 민주당, 흑인과 백인이 함께 어울린다. 무엇보다 미국 대통령도 보통 사람임을 말해 준다. 미국의 부드러운 힘이 부럽다.

지난주 개봉된 영화 ‘설리-허드슨강의 기적’은 2009년 비행기가 허드슨강에 불시착해 155명을 구한 이야기다. 물 위의 비행기 날개에 길게 늘어선 탈출 승객들의 영화 포스터는 세월호를 연상시킨다. 설리 기장은 “누구 더 없습니까”라고 확인한 뒤 맨 마지막으로 탈출한다. 그는 “우리는 할 일을 했을 뿐 영웅이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승객을 내팽개치고 팬티 차림으로 도망친 세월호 선장과는 너무 다르다.

최근 SNS에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일본 에다노 유키오 관방장관의 사진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는 109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고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직접 국민들에게 설명했다. 그 닷새 동안 그의 얼굴은 엄청 초췌해졌지만 국민들의 신뢰는 몰라보게 되살아났다. 이 사진이 다시 화제가 된 것은 경주 지진 때문이다. “지진이 나도 되도록 다음날 보고하고 (환경부) 장관을 깨우지 말라”는 한국 기상청 매뉴얼과 대비된 것이다.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로 인해 법조계가 쑥대밭이 됐다. 그에게서 레인지로버 등을 챙긴 김수천 부장판사를 보며 일본의 야마구치 요시타다(山口良忠) 판사를 떠올렸다. 야마구치는 패전 직후 식량통제법을 전담하는 도쿄지법 평(平)판사였다. 그는 “이 법은 국민을 굶겨 죽이는 악법이지만 나는 지켜야 한다. 암시장 쌀 대신 차라리 행복하게 굶어 죽을 생각이다”는 일기를 남겼다. 33세의 그는 끝내 배급 쌀로 버티다 죽음을 선택했다.

검찰은 법원보다 더 처참한 신세다. 넥슨 주식을 받은 진경준 검사장과 ‘스폰서 부장검사’로 인해 초상집이 됐다. 흔히 한·일 검찰을 비교하며 “일본 검찰은 낙하산 인사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틀린 이야기다. 일본 검사들은 거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등 수도승 생활을 한다. 그러나 국가가 부를 때는 전혀 다르다. 1998년만 해도 초대 금융감독청 장관에 히노 마사하루 나고야 고검장이 임명됐고, 공정거래위원장에 네고로 야스치카 전 도쿄고검장이 앉았다. 증권감독원장에도 미즈하라 도시히로 전 나고야 고검장이 호출됐다. 대장성·일본은행 등이 온갖 스캔들로 비틀대자 깨끗하고 처신이 올바른 검찰 간부들을 대거 구원투수로 등판시킨 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작은 영웅들은 있다. 의정부 화재 때 밧줄로 10명을 구한 뒤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성금을 사양한 의인이 있었다. 서울 서교동 화재 때도 일일이 초인종을 누른 뒤 숨진 28세의 안치범씨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윗물이 흐린 게 문제다. 최근 들어 청와대와 여야 정치권, 장관들의 감동적 장면은 기억나는 게 없다. 박 대통령이 오바마처럼 전직 대통령과 인상적인 장면을 주고받는 걸 본 적이 없다. 어쩌면 2011년 김황식 총리의 연평도 희생자 1주기 추모식 장면이 마지막 감동이 아니었는가 싶다. 김 총리는 우산을 받쳐 주려는 경호팀장에게 “됐다. 치우라”며 40분 내내 초겨울 장대비를 맞았다.

깊은 울림의 외국 사진들을 볼 때마다 우리가 한층 초라해진다. 대단한 장면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을 따름이다. 저 혼자 탈출하는 선장, 스폰서 판·검사, 지진이 나도 잠을 자는 장관을 떠올리면 너무 끔찍하다. 소름이 돋는다. 서양에는 “물고기는 머리부터 썩는다”는 속담이 있다. 혹시 우리도 머리부터 썩기 시작한 게 아닌지 섬찟하다. 어느 때보다 우리 공동체가 감동에 목말라 하는 느낌이다. 지도자들의 상식적 몸짓 하나에도 충분히 감동할 준비가 돼 있는 분위기다.

이철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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