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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능란한 외교술 … 영토확장의 실익 얻다!

중앙선데이 2016.10.02 03:18 499호 1면 지면보기
【총평】



고려 건국과 민족 재통일을 전후하여 중국에서는 당이 멸망하고 5대 10국이 흥망하고 있었고, 북쪽에서는 거란족이 요를 세우고 발해를 멸망시킨 뒤 중국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어서 중국에서는 송이 등장하여 5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중앙 집권적인 황제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는 송을 공격하기 위한 거란의 친선 관계 수립 요구를 거절하고, 오히려 북진 정책과 친송 정책을 추진했다.?


-64-외교정책

고려와 송은 오랫동안 친선 관계를 유지해 왔다. 두 나라가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았고, 거란과 여진을 견제하기 위해 상대편을 정치, 군사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고려는 송과의 외교 관계에서 실리를 추구했다. 송이 거란에게 빼앗긴 연운 16주를 되찾으려고 고려에 군사를 요청했을 때 고려는 송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려 전기 동아시아의 정세(출처: 천재교육 한국사)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주위의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어 가던 중 942년에 고려에도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보내왔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고 여기어 거란 사신들을 섬으로 유배하고 모든 낙타를 만부교 아래에서 굶겨 죽였다(만부교 사건). 이로써 고려와 거란의 외교 관계는 단절 되었다.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어 낙타 50필을 가져왔다. 그러나 왕은 "거란이 예전부터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다가 문득 다른 생각을 내 맹약을 돌아보지 않고 하루 아침에 멸망시켰으니 무도함이 심하다. 그러니 멀리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을 만하지 못하다."라고 하고, 그 교빙을 끊었으며, 그 사자 30명을 섬으로 귀양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밑에 매어 굶어 죽게 하였다.

-"고려사"-

거람은 짐승의 나라이고 풍속이 같지 않고 또한 언어가 다르니, 그들의 의관 제도를 아예 본받지 말라.

-"고려사"-?



고려 초에는 송과 거란 사이에서 신중한 외교 정책을 펼칠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태조 왕건은 거란에 적대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가 내세운 명분은 거란이 같은 민족인 발해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려가 북진 정책과 친송 정책을 계속 추진하자 거란은 발해 유민이 압록강 일대에 세운 정안국을 정복한 다음 고려를 여러 차례 침입해 왔다.



?거란의 1차 침입 때는 서희가 나서서 적장 손소녕과 담판을 벌였다. 서희는 거란으로부터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여진이 차지하고 있는 땅을 확보하여 통로가 열리면 통교하겠다는 조건으로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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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와 거란 장수 소손녕의 담판>

소손녕 : 나는 큰 나라의 귀한 사람이니, 그대가 뜰에서 나에게 절해야 한다.

서 ?희 : 신하가 임금에게 절할 때나 뜰에서 하는 것이다. 두 나라 대신들이 만나는 장소에서 그럴 수 없다.

소손녕 : 고려는 옛 신라 땅에서 나라를 세웠고, 고구려의 옛 땅은 거란의 소유인데 고려가 차지하였다. 또 고려는 거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도 송을 섬기고 있어 출병하였다.

서 ?희 : 그렇지 않다. 우리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이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고려라고 하였다. 오히려 거란의 동경이 우리 국경 안에 있다. 그리고 압록강 근처도 우리 땅인데 현재 여진이 차지하여 길을 막아 거란과 국교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여진을 쫓아내고 길을 통하면 국교를 통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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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는 당시 고려 정부 내에서 거란의 땅을 떼어 주자는 논의를 반박하고, 자신이 직접 거란과 담판을 벌였다. 그는 담판에서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영토를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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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2차 침입 때는 개경이 함락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배후에서 양규가 선전하자 거란군은 퇴로가 차단될 것을 두려워하여 고려와 강화하고 물러갔다. 거란의 3차 침입 때에는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강동 6주의 하나인 귀주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귀주 대첩,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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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군이 귀주를 통과할 때 강감찬 등이 동쪽 교외에서 이들을 맞아 싸웠는데, 승부를 보지 못한 채 두 부대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이 때 김종현의 부대가 도착하였는데, 마침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으로 휩쓸려 와서 깃발이 북으로 나부꼈다. 고려군은 이 기세를 타고 맹렬하게 공격하니, 거란군은 북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석천을 건너 반령에 이르는 중간에 적들의 시체가 들판에 널렸고, 생포한 적병과 노획한 말, 낙타, 갑옷, 투구, 병기 등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적병 중에 살아 돌아간 사람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다.

-"고려사"-

낙성대의 강감찬 동상(서울 관악)강감찬은 성종 때 과거에 장원 급제한 문관이다. 낙성대라는 지명은 그가 태어날 때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하는 데서 유래하였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강감찬의 귀주 대첩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강감찬은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을 맞아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거란군은 수도인 개경을 향해 곧바로 진군하였고, 강감찬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귀주 대첩의 승리로 두 나라의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으며, 이후 거란은 군사 동원에서 외교로 고려에 대한 정책을 바꾸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고려는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고, 북쪽 국경 일대에는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대비했다. 고려가 거란의 계속되는 침략을 막아내자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공격할 수 없었고, 송을 침입할 수도 없었다. 결국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격퇴함으로써 고려, 송, 거란 사이에는 세력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거란의 침입과 고려의 대응(출처: 지학사 한국사)



여진은 시기에 따라 숙신, 또는 말갈 등으로 불렸는데, 발해가 멸망한 뒤에 부족 단위로 숙신, 또는 말갈 등으로 불렸는데, 발해가 멸망한 뒤에 부족 단위로 흩어져 발해의 옛 땅에서 반독립적인 상태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려는 여진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면서 포섭하는 등 회유와 동화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12세기 초에 만주 하얼빈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의 추장이 세력을 키워 정주까지 남하하여 고려와 충돌이 일어났다.



여진과의 1차 충돌에서 패한 고려는 윤관의 건의에 따라 특수 부대인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 정벌을 준비했다.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천리장성을 넘어 여진을 북방으로 쫓아내고(1107), 동북 지방 일대에 9성을 쌓았다.

<척경입비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윤관이 9성을 개척하고 비석을 세우는 장면을 그린 조선후기의 그림이다.(출처: 지학사 한국사)



여진 추장들의 복종과 충성 맹세를 받고, 여진이 사신을 보내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여 1년 만에 9성을 돌려주었다. 그 후 세력이 커진 여진은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금이라 했다(1115).?



금은 얼마 되지 않아 거란이 세운 요를 멸망시켰으며 송을 남쪽으로 내몰고 중국 화북 지방을 차지했다. 여진(금)은 고려에 형제 관계를 요구했다. 거란을 멸한 뒤에는 고려에 압력을 가하면서 군신 관계를 요구했다. 고려는 이를 둘러싸고 정치적 분쟁을 겪기도 했지만, 당시 집권자였던 이자겸은 정권 유지를 위해 금과 무력 충돌을 하기 어려운 점을 들어 금의 요구를 수용했다. 이후 금에 대한 사대에 반발하여 묘청이 서경 천도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고려와 금은 대체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고려는 금과 요 및 송의 치열한 경쟁 상황을 이용하여 압록강 유역의 요지인 보주(의주)를 확보하는 등 실리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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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키워드】?



☞ 고려는 [북진 정책]과 [친송 정책]을 추진했다. 고려는 송과의 외교 관계에서 [실리를 추구]했다. 만부교 사건]을 계기로 고려와 거란의 외교 관계는 단절 되었다. 거란의 1차 침입 때는 [서희]가 나서서 적장 [손소녕과 담판]을 벌여, 강동 6주를 확보했다. 거란의 2차 침입 때 배후에서 [양규]가 선전하자 거란군은 퇴로가 차단될 것을 두려워하여 [고려와 강화]하고 물러갔다. 거란의 3차 침입 때에는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강동 6주의 하나인 귀주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귀주 대첩, 1019)]. 고려는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고, 북쪽 국경 일대에는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대비했다.



고려는 [윤관]의 건의에 따라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 정벌을 준비]했다.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북방으로 쫓아내고(1107), [동북 지방 일대에 9성을 쌓았다]. 여진 추장들의 복종과 충성 맹세를 받고 1년 만에 9성을 돌려주었다. 그 후 세력이 커진 [여진]은 나라를 세워 국호를 [금]이라 했다(1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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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문제와 해설 】



1. 다음 정책이 제기된 시기의 국내외 정세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대부분의 신하들은 금나라에 대한 사대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중서령이 아뢰기를, “옛날의 금은 거란과 우리를 섬기는 소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갑자기 강성해져서 거란을 멸망시켰습니다. 또 우리와 영토가 맞닿아 있으므로 정세가 사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니, 먼저 사신을 보내어 예를 갖추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자, 왕이 이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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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경 일대에 천리장성을 쌓았다.



② 부처의 힘을 빌려 이민족의 침입을 물리치려고 대장경을 간행하였다.



③ 서경 유수가 집권 세력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키자 농민들이 가세하였다.



④ 과거를 통해 진출한 지방 출신들이 국왕의 측근 세력이 되어 문벌 귀족과 대립하였다.



⑤ 경상도 해안에 출몰하던 왜구가 전라도 지역까지 침범하였고 개경 부근에도 나타났다.

2012학년도 수능 1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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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정답 ④

제시문은 고려 인종대에 여진이 금을 건국하고 고려에 군신의 예, 사대를 요구한 내용이다. 이자겸 등은 정권 유지 등을 이유로 찬성하였다.

④ 이 시기에는 이자겸과 경원 이씨의 권력 독점에 반발하여 왕을 중심으로 측근 세력이 결집, 문벌 귀족에 대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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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밑줄 친 ‘묘청’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묘청이 (국왕에게) 건의하기를 “제가 보건대, 서경(평양) 임원역의 땅은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아주 좋은 땅입니다. 만약 이곳에 궁궐을 세워 옮기시면 가히 천하를 합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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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강동 6주를 획득하였다.



② 서경 천도를 추진하였다.



③ 대몽 항쟁을 주도하였다.



④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였다.



⑤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2015년 6월 학력평가 16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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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정답 ②

② 묘청은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서경(평양) 천도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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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A지역을 지도의 (가)~(마)에서 옳게 고른 것은??



○ 탐구 주제 : 고려의 영토 확장



○ 조사 대상 : A 지역



○ 조사 내용



- 성종 12년 서희가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을 통해 확보함



- 현종 4년 거란이 사신을 보내 반환을 요구함



- 현종 10년 강감찬이 거란군의 침입을 물리친 이후 거란의 반환 요구가 종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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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가)



② (나)



③ (다)



④ (라)



⑤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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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학년도 6월 모의평가 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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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정답 ③

제시문의 A 지역은 서희가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을 통해 확보한 강동 6주이다.

③ 서희가 소손녕과의 담판으로 확보한 강동 6주의 위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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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음 사실이 있었던 시기를 연표에서 옳게 고른 것은?



거란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자 왕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임명하였다. … (중략) … 흥화진에 이르러 기병 1만 2천 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동아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고 기다렸다. 적이 다가오자 막아 놓았던 물줄기를 터뜨리고 복병을 돌격시켜 크게 승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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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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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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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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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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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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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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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장성



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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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9성



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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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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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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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멸망

???????????

① (가)



② (나)



③ (다)



④ (라)



⑤ (마)

?* 2015학년도 9월 학력평가 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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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정답 ①

제시문은 거란의 3차 침입을 귀주 대첩으로 막아내는 내용이다.

천라장성 축조는 거란 3차 침입 이후이다.

① (가) 시기는 거란이 침입한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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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가)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천리 장성을 넘어 여진을 북방으로 쫓아버리고, 동북 지방 일대에 9성을 쌓아 방어하였다.



(나) 살리타를 대장으로 하는 몽골군이 처인성을 공격하자, 김윤후는 처인성의 부곡민과 함께 살리타를 사살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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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강감찬은 귀주에서 거란을 크게 물리쳤다.



② 묘청은 서경 천도와 금국 정벌을 주장하였다.



③ 서희는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확보하였다.



④ 삼별초는 개경 환도에 반대하여 대몽 항쟁을 벌였다.



⑤ 공민왕은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을 수복하였다.

* 2014년 6월 학력평가 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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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정답 ②

(가)는 12세기 초 윤관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축조 관련 내용이다. (나)는 13세기 초 김윤후가 처인 부곡민과 함께 몽골군을 격퇴한 처인성 전투이다.

② 묘청은 12세기 초 고려 인종대에 서경 천도와 금국 정벌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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