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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면 남자 골퍼 되고파 … 여자 정상엔 올라봤으니”

중앙선데이 2016.10.02 00:39 499호 25면 지면보기

지난달 29일 솔모로CC에서 만난 박세리 프로는 “여자 프로골프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 한국의 남자 골프도 동반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여주=전민규 기자



“5년 전에만 올림픽에 골프가 들어갔다면 정말 도전해 봤을 겁니다. 이젠 큰 경험 쌓을 기회는 후배에게 양보해야죠. 오히려 감독으로서 선수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나 고민하다 보니 배운 게 많아요. 부담이 컸을 텐데 잘 이겨내고 금메달을 딴 박인비를 보니 기쁘고 고마워 눈물이 났죠.”


은퇴 앞둔 ‘여자골프 맏언니’ 박세리

‘세리 키즈’ 박인비(28)를 2016 리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이끈 감독 박세리(39·하나금융그룹). 그는 오는 13일 인천 스카이72 골프장에서 개막하는 KEB하나은행 챔피언십에서 은퇴식을 갖고 팬들과 작별 인사를 한다. 그는 1997년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LPGA 25개 대회 우승(메이저 5개), LPGA 명예의 전당 입회 등 찬란한 금자탑을 쌓았다. 한국 여자골프의 ‘맏언니’는 올림픽 금메달 도우미 역할까지 해냄으로써 선수 인생에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1998년 US여자오픈 연장전에서 나온 박세리의 ‘맨발 해저드 샷’장면. 박 프로는 “지금 봐도 짜릿하고 느낌이 새롭다. 똑같은 상황이 다시 와도 그때처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이달 13일 KEB하나은행 대회서 은퇴식]지난달 29일 OK저축은행 박세리 인비테이셔널이 열리고 있는 경기도 여주의 솔모로 CC로 박세리 프로를 만나러 갔다. 대회 로고에는 그 유명한 ‘맨발 해저드샷’장면이 새겨져 있다. 박 프로가 ‘인생 최고의 샷’으로 꼽는 장면이다. 98년 LPGA 메이저 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는 태국의 아마추어 추아시리폰과 연장전을 치른다. 마지막 18번 홀 티샷 한 공이 연못 근처에 떨어지자 박세리는 양말을 벗고 해저드에 들어가 샷을 해 위기를 탈출한다. 재연장 끝에 박세리는 챔피언이 된다. 스물한 살 박세리의 투혼은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로 힘들어하던 대한민국에 큰 위로와 자극을 줬다.



“너무나 생생해서 어제 일 같네요. 그때는 겁이 없고 한참 배울 때였죠. ‘이 샷을 하면서 내가 몰랐던 걸 배울 수 있겠구나’ 한 가지만 생각했어요. 성공 확률이 희박했지만 도전해 보고 싶었어요. 그 샷이 오늘날 박세리를 만들었고, 한국 여자골프를 세계 정상으로 이끄는 디딤돌이 됐다고 믿어요.”



‘인생 최악의 샷이 무엇이었나요’라는 질문에 그는 10분 이상 진지하게 얘기를 풀어 갔다. 그 속에 프로골퍼 박세리의 고민과 연륜이 묻어 있었다.



“스스로를 관리하지 못한 게 최악의 샷이죠. 전 모든 걸 완벽하게 준비하고 잘 하는 줄 알았어요. 심지어는 슬럼프 대비도 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공이 안 맞는 거예요. 부상이 온 것도 아니고, 이유가 없으니 더 괴로운 거죠. 아, 이게 슬럼프구나 싶어서 더 지독하게 연습했어요. 하면 할수록 더 안 되고 좌절감만 커지고…. 때마침 손가락 부상이 생겨서 채를 잡을 수가 없게 됐어요.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전혀 없으니 이러다가 우울증에 걸리는구나 싶었죠.”



그게 2004년부터 1년 반 동안 박세리가 통과한 ‘어둠의 터널’이었다. 그는 ‘골프채 하나로 꿈을 이뤘지만 채를 빼면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자각을 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과 커피를 마시고 살아가는 얘기를 하면서 슬럼프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요즘 유행어로 ‘비움’, ‘내려놓음’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박세리는 후배들에게 "자신을 아끼라"는 말을 자주 한다. “요즘 후배들은 훈련이든 자기관리든 똑 부러지게 110% 이상 합니다. 그런데 골프 말고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 못해요. 직업과 취미, 집중과 휴식의 밸런스를 잘 맞춰야 더 오래 하고 더 즐길 수 있어요.”



박세리는 ‘세리 키즈’를 낳았고, 박인비는 또 ‘인비 키즈’를 낳을 것이다. 박세리는 “한국 여자골프가 세계 최고가 됐으니 오래오래 정상을 지켰으면 좋겠어요. 유망주들이 쑥쑥 자라날 수 있도록 토양을 만들어주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가 지난 9월 국회에서 ‘골프장 개별소비세 폐지 법안’에 지지 연설을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2만원 좀 넘는 개별소비세가 학생 선수들과 학부모에게는 버거운 액수라는 거다.



한국 여자 골퍼들은 중·고교 시절부터 치열한 경쟁을 통해 실력을 연마한다. 그 와중에 학생 선수들이 수업을 빠지고 하루 종일 연습을 하는 ‘스윙 머신’이 될 위험이 크다. 박 프로는 이 점을 경계했다. “골프가 워낙 어렵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건 맞아요. 그래도 학생 선수들이 기본 수업은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생활에 필요한 배려, 에티켓, 대인관계 등을 배울 수 있어요. 크게 성공한 선수들 거의가 인성이 좋아요.”



한국의 골프 문화는 매우 독특하다. 내기를 포함해 기상천외한 룰을 만들고, 이를 주관적으로 적용한다. ‘캐디언니’와 짙은 농담이 오가고, 성희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라운딩 후는 물론이고 중간에도 술잔을 주고받는다. 이런 요소들 때문에 ‘골프는 특권층 운동’이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98년 맨발 샷’으로 골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 바꾼 박 프로이기에 안타까움이 더 크다. “골프처럼 좋은 스포츠는 없다고 봐요. 온 가족이 즐길 수 있고, 천천히 걸어가면서 대화도 나눌 수 있고. 그런데 스포츠 외에 다른 요소들이 끼는 바람에 욕을 먹는 거죠. 골프를 스포츠로만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것도 세계에서 한국인이 가장 잘 하는 스포츠로요.”



주말골퍼에게 팁을 하나만 달라고 했다. 박 프로가 웃으며 말했다. “욕심을 버려야죠. 주말골퍼는 연습량이 적어요. 새벽에 먼 거리를 운전해 와 파킹하자마자 옷 갈아입고 티샷 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 분들일수록 바라는 게 많습니다. 무조건 캐디언니 말 들어야 해요. 저기 보고 치세요 하는데 얼토당토 않은 곳 보고 쳐놓고 ‘어, 이건 아닌데’하는 분들 많아요.”



 



["골프는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좋은 운동"]박세리의 가족은 유난히 우애가 깊다. 세 자매 중 둘째인 박 프로는 아버지(박준철씨)에 대해 “친구 같고, 애인 같고, 오빠 같은 분”이라고 했다. “인상이 강해 보이지만 실제는 무척 가정적이고 재미있는 분이세요. 아빠 같은 사람 찾다 보니 시집 못 가고 있어요. 하하.”



‘전반 나인 홀 끝나고 그늘집에서 잠시 쉬는 중’이라고 자신의 골프 인생을 중간정리한 박 프로는 “전반에 벌어놓은 스코어가 있으니 후반에는 전략적이고 차분하게 풀어나가고 싶어요. 그러다 보면 골프인생 마무리를 잘 할 수 있겠죠”라고 했다.



다시 태어나도 골프를 하겠냐고 묻자 그가 뜻밖의 답을 내놨다. “물론이죠. 그런데 남자 골퍼가 되고 싶어요. 여자로는 정상에 올라봤으니까….”



 



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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