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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의 복수보다 줄리엣의 사랑이 훨씬 소중한 가치”

중앙선데이 2016.10.02 00:33 499호 24면 지면보기
“솔직히 이거 완전 막장이잖아요. 아버지는 삼촌한테 죽고, 엄마는 삼촌이랑 결혼하고, 죽은 아버지는 유령으로 나타나고, 삼촌은 죽이지도 못하고 괜히 애인 아빠만 죽이잖아요. 애인은 자살하고, 애인 오빠는 복수하겠다고 난리고, 그냥 다 미친 사람들 같아요.” (연극 ‘함익’ 중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명쾌하게 요약한 대사다. 이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가 400년 넘게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가장 널리 공연되는 ‘연극의 대명사’가 됐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라 솔직히 지루하지만, 누구도 감히 칼을 대지 못하는 건 그런 원전의 위엄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타계 400주년을 맞아 공연되는 수많은 ‘햄릿’도 저마다 ‘새로움’을 외치지만 조금 살을 붙이거나 뺏을 뿐, 기본 골격은 똑같다.


햄릿 골격 비튼 '함익', 현대사 파노라마 '썬샤인의 전사들' 쓴 김은성

그런데 골격 자체를 과감히 비튼 ‘진짜 새로운’ 햄릿이 나왔다. 서울시극단의 ‘함익’이다. ‘줄리엣을 꿈꾸는 햄릿’이란 발칙한 시도를 한 건 젊은 극작가 김은성(39). 최고의 연출가 김광보 서울시극단 예술감독이 직접 무대를 구현했다. 사흘 먼저 개막한 두산아트센터 기획공연 ‘썬샤인의 전사들’도 김 작가의 작품이다. 비중 있는 공연기관들이 한 작가의 신작을 동시에 올리는 것이 무척 이례적일 뿐더러, 두 작품 모두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을 그린 문제적 대작이다. 두 작품의 개막 직전 그를 만났다.



 



“경쟁구도요? 협력구도죠. 프로그램북에도 서로의 광고를 싣고 있어요. ‘같이 살거나 같이 죽거나’인데, 아마도 같이 살게 되겠죠?(웃음)”



김은성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을 나왔다. 2012년 ‘목란언니’로 동아연극상과 대한민국연극대상, 두산연강예술상을 휩쓴 이래 연극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작가다. 하지만 굳이 본인을 ‘무명작가’로 규정짓는다.



“우리 사회에서 연극의 위치가 있잖아요. 지난 추석에도 가족들이 묻더군요. ‘썬샤인의 전사들’은 ‘태양의 후예’에서 영향받았느냐고요. 말문이 턱턱 막히더라고요(웃음). 아직 못나서 드라마를 못 쓰는 줄 오해받는 현실인데, 연극계 안에서 좀 알려진 게 별일인가요. 극작가도 지금보다 더 유명해지는 날이 왔으면 해요. 희곡집도 좀 팔리고 연극도 훨씬 많이 보러 다니고. 그럴 때 제가 무명작가가 아니게 되겠죠.”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을 각색한 ‘달나라 연속극’,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를 각색한 ‘순우 삼촌’ 등, 그는 특히 고전 비틀기에 두각을 나타내 왔다. 단순히 배경을 한국으로 옮겨오는 정도가 아니라, 한국 현대사와 자본주의의 부조리에 대한 화두를 고전에 심어넣는 게 그만의 재창작 방식이다.



‘함익’도 그런 화두가 뚜렷하다. 자본주의 먹이 사슬 꼭대기에서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진실한 인간관계가 결핍된 채 평범한 사랑 한번 못해본 현대판 햄릿의 비극이다. 순수 창작물인 ‘썬샤인의 전사들’도 마찬가지. 잘나가던 소설가가 세월호가 연상되는 재난상황에서 가족을 잃은 뒤 부끄러운 자신의 과거를 들춰보며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대면하는 이야기다.



어느 쪽이 더 기대되나요. “제겐 똑같이 소중한데, 관객 반응은 ‘함익’이 훨씬 더 궁금해요. 한국에서 ‘햄릿’을 변형시키는 작업은 굉장히 큰 성역을 건드리는 것처럼 여겨지죠. 금테 두른 세계 명작을 어떻게 망치나 두고 보겠다며 벼르는 사람이 많은데, 기죽지 않으려고 애쓰며 썼어요. ‘햄릿’으로 이래 볼 수도 있는 거지, 하는 경쾌하고 되바라지고 방자한 기분으로 썼는데, 응원받을지 건방진 짓거리라고 평가 받을지 모르겠어요.”



두 작품 다 자본계급의 상징으로 ‘이시가리’(줄가자미)가 등장하던데. “재미있는 연결고리로 넣었어요. 이름도 못 들어 본 고급 회를 일부러 검색해서 찾았죠. 저는 송로버섯이란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어떤 세계에서 잘 알려진 음식을 모르고 있었을 때 질투도 나고 부럽기도 한, 그런 느낌을 노린 거죠. 요코하마 출신 주방장이 뜨는 회라니 진짜 귀한 건가 보다, 이런 느낌 들지 않나요?(웃음)”



‘썬샤인’에서 K타워 붕괴는 특정 건물을 연상시키는데요. “그게 무너지는 비극은 절대 없어야겠죠. 자본주의 고층 빌딩을 대표적으로 상징하고 싶었어요. 어떤 모순에서 지어진 건물이잖아요. 대단히 필요한 건물도 아닌데 군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공항의 비행 이착륙 동선에 영향을 주는, 절대 허가가 떨어지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어진 모순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어요.”



내면을 그리던 작가 승우가 가족을 잃고 역사를 논하는 게 좀 비약적이지 않나요. “연출가의 말인데, 세월호가 건져지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월호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비극적인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 넘어가야 한다는 거죠. 인간은 자기 앞에 비극이 벌어졌을 때 내가 어떤 실수를 했었는지 찾게 되잖아요. 가해자였던 과거를 묻고 살던 승우가 가족을 잃고 피해자가 된 건 결국 가해자였던 과거에서 비롯된 문제고, 작가로서 그걸 써내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역사 속에서 가해자가 언제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건가요. “역사적 비극의 가해자들을 들여다보면 피해자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아요. ‘백두산호랑이’로 유명했던 김종원도 일본군으로 징집돼 남태평양에서 지옥을 경험한 뒤 살인마가 됐죠. 면죄부를 주자는 게 아니라 그들을 더 깊게 들여다봐야 한다는 거예요. ‘나쁜 놈’이라고 심정적으로 단죄하는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흐름을 직시해야만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을 거란 얘기죠.”



그는 “악마를 단죄할 때도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악마와 싸울 때 악마처럼 변해가는 걸 조심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처럼, 악마를 물리치고 더 나쁜 악마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을 깊숙이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건 연극의 역할에 대한 은유기도 하다. “중요한 건 ‘본다’는 거예요. 본 것을 쓰거나 그린다는 게 제 주요한 키워드인데, 본 것을 세밀하게 그리는 게 연극인 거죠. ‘인류가 원자폭탄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세부묘사’라는 미국 작가 나탈리 골드버그의 말을 좋아하거든요.”



“중요한 건 본다는 것, 똑바로 보고 세밀하게 그리는 게 연극” 서울시극단의 셰익스피어 시리즈로 ‘햄릿’ 각색을 의뢰받았을 때는 그도 단순히 조폭 재벌가 이야기로 옮겨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원작의 플롯을 살리려 하니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살아있는’ 연극이 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발견한 것이 햄릿의 여성성과 사랑의 결핍 문제였고, 그렇게 태어난 게 ‘줄리엣 같은 찐한 사랑을 해 보고 싶은 여자 햄릿’이다.



“햄릿의 숨은 시간들을 상상해 보니 방 안에 웅크려 고민하는 모습이 떠올랐어요. 복수 서사는 밀어내 버리고 중압감에 눌려있는 캐릭터만 가져왔죠.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라지만 사실 ‘죽일까 말까의 고민’이 계속된 거잖아요. 그런 병든 마음에 사랑도 선명하게 못하더군요. 마음이 오가는 자연스런 경험을 해 보지 못하고, 오직 짜여진 구조 속에 돈으로 해결되는 관계에 익숙한 여성에게 누군가를 진짜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어떨까 싶었어요.”



그는 누군가 ‘햄릿 갖고 이런 얘기밖에 못하냐’고 한다면 ‘이게 얼마나 중요한 얘기인 줄 아느냐’고 답하고 싶다고 했다. ‘함익’을 통해 던지고픈 메시지가 ‘복수? 웃기네, 사랑이야’라는 것이다.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가요. 스무 살에는 다들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기를 꿈꿨잖아요. 인간으로서 당연한 건데, 여기 그것도 못하는 여자가 있어요. 우리가 돈과 자본을 좇다가 진짜 소중한 걸 조금씩 잃어가는 게 아닐까요.”



다 함께 파국을 맞는 원작에 비해 혼자만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대본상의 다소 답답한 결말은 무대 위에서 연출적으로 해소됐다. 김광보 연출이 “대단히 연극적인” 미장센으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 낸 것이다. “위대한 비극의 주인공들은 다 자살을 하죠. 함익은 정말로 살아있고 싶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거예요. 이건 현실이 아니고 연극이니까, ‘컷아웃’ 이후 여운을 남기고 싶었어요. 우울하고 지쳐있는 마음들이 극장에서 함익의 모습과 만나면 삶에 어떤 힘을 얻지 않을까요. 그래서 연극이 필요한 거죠.”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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