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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푸 “못나게 굴다 공산당에 정권 송두리째 헌납”

중앙선데이 2016.10.02 00:30 499호 28면 지면보기

1 중일전쟁시절 쿵샹시(왼쪽 셋째)와 함께 주중 외교사절 초청 다과회에 참석한 천리푸(오른쪽 둘째). 1938년 가을 전시 수도 충칭.



정당연합은 성공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천리푸(陳立夫·진립부)는 중국이 복잡해진 이유를 국·공합작이라고 단정했다. 특무조직 특공총부를 발족시킨 후, 합작기간 동안 국민당에 입당한 공산당원들의 종적을 추적했다.


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97-

내부 단속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총부 안에 어문조(語文組)를 신설했다. “신문과 잡지에 실린 글들을 정치·경제·군사·교육 네 부분으로 정리해서 분석해라.”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1인 통치에 불리한 글을 게재한 언론기관은 수시로 날벼락을 맞았다.



중공도 천리푸의 특무조직에 의해 치명타를 입었다. 중앙위원 40명과 일반간부, 당원 2만4000여 명이 체포되고 276명이 자수하거나 변절했다. 변절자들도 성치 못했다. 중요 정보를 빼낸 뒤 저 세상으로 보내버렸다. 중공 총서기 샹충파(向忠發·향충발)는 체포 당일 변절했지만 코와 귀가 잘린 차가운 시신으로 변했고, 상하이의 중공 지하조직을 털어놓은 구순장(顧順章·고순장)도 온전치 못했다. 2대 총서기 취추바이(瞿秋白·구추백)와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뤄이눙(羅亦農·나역농), 농민황제 펑파이(澎湃·팽배) 등은 재판정에 서보지도 못하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이끌던 상하이의 중공 중앙 조직도 14차례 파괴됐다. 중앙 소비에트 지역인 징강산(井岡山)으로 도망치는 것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천리푸가 특무의 총본산인 조사과를 주재하던 기간은 길지 않았다. 군사위원회로 보직을 옮긴 후에도 특무조직은 천리푸가 직접 관장했다. 화가 쉬페이훙(徐悲鴻·서비홍)의 부인과 염문을 뿌린 장다오판(張道藩·장도번)과 건축가 쉬언쩡(徐恩曾·서은증) 등이 조사과장을 역임했지만 천리푸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국민당 조직부와 특무조직까지 장악한 천씨 형제의 위세는 아무도 넘보지 못했다. 공개된 장소에 나타나는 법이 드물고, 돈도 밝히지 않다 보니 무서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중공 이론가 천보다(陳伯達·진백달)가 천씨 형제를 장제스 일가와, 장제스의 동서 쿵샹시(孔祥熙·공상희),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의 친정형제와 묶어서 “중국의 4대가족”이라 부를 만도 했다.



천리푸는 나머지 세 가족과 원만했다. 쿵샹시와도 처음에는 그랬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모순은 돈과 남녀문제에서 비롯된다. 천리푸는 군에 기반이 약했다. 쑹메이링의 부탁도 있었지만, 장제스의 애장(愛將)인 황푸 1기 후쭝난(胡宗南·호종남)과 쿵샹시의 딸을 결혼 시키려고 애를 썼다. 쿵샹시의 딸은 정상이 아니었다. 심할 때는 정신병원에 보내도 될 정도였다. 행실도 형편 없었다.

2 쿵샹시는 중국 IOC 위원이었다. 1936년 여름 베를린 올림픽에 참석해 히틀러와 환담하는 쿵샹시.  [사진 김명호 제공]



후쭝난은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다. 천리푸가 하도 권하자 면박을 줬다. “나도 귀가 있다. 그 여자는 걸레 중에 상 걸레다. 내게 권하지 말고, 너나 데리고 살아라.” 이 일을 계기로 천리푸와 쿵샹시는 서먹서먹한 사이가 됐다.



천리푸는 돈과 여자에 담백했다. 평소 자금을 호소하는 당원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돈이 필요하면 쿵샹시에게 달라고 해라.” 퍼스트 레이디 쑹메이링의 큰형부이며 행정원 부원장과 재정부장을 겸했던 쿵샹시는 소문만 공자의 후손으로 알려졌을 뿐 돈 많은 전당포집 아들이었다. 재신(財神)소리 들을 정도로 돈을 밝혔다. 무조건 챙기는 습관이다 보니 국고도 많이 축냈다. 천리푸는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체했다.



당과 특무기관을 장악한 천씨 형제는 금융기관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정부의 재정 대권은 재정부장 쿵샹시가 쥐고 있었다.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쿵샹시가 미국원조기금을 슬쩍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쿵샹시는 “지금 우리는 전쟁 중이다. 온 국민이 단결해야 할 때다. 증거 없는 허무맹랑한 소문에 현혹되지 말라”며 딱 잡아뗐다.



천리푸는 폭로를 작정했다. 평소 좌지우지하던 일간지 신보(晨報)에 연일 관련 기사를 게재했다. “구린 곳을 숨기려는 사람들은 궁지에 처할 때마다 단결을 요구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사람은 지도자 대열에 낄 자격이 없다.” 쿵샹시의 부인이 동생 쑹메이링을 찾아가 하소연했다. 그날 밤 장제스의 침실에서 베갯머리 송사가 벌어졌다. 장제스는 현명했다. 신보를 폐간시키고 쿵샹시도 날려버렸다. 훗날 장제스는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내가 한발 늦었다. 민심이 저만큼 가버린 것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천리푸도 말년에 속내를 털어놨다. “그때 우리는 너무 유치했다. 위기만 강조하면 국민이 따라올 줄 알았다. 국민당은 공산당과의 싸움에서 패한 게 아니다. 못나게 굴다 보니 정권을 송두리째 헌납했다.”



장제스의 천리푸에 대한 신임은 끝이 없었다. 항일전쟁 초기, 전국의 전시교육을 천리푸에게 맡기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를 천리푸가 장식했다.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으로 중국에 오래 체류했던 하버드대학 교수 존 킹 페어뱅크의 평이 눈길을 끌었다. “천리푸에게 교육부장을 맡긴 것은 루스벨트가 연방수사국(FBI) 에드가 후버 국장을 교육부 장관에 임명한 것과 같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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