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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Deja vu by system #8. 예언(豫言)

중앙일보 2016.10.0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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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성은 머리통을 맞은 느낌에 깊은 숨을 연거푸 쉬었다.
 
“참고로, 역사는 예정이 된 그대로 흘러가야 하기 때문에, 특정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사라져야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할 수 있어요.”
 
“...?!”
 
“재성님의 선택에 따라 그의 자리가 앞으로 재성님의 자리로 바뀌게 될 겁니다. 그가 누려온 것들. 그가 앞으로 누릴 수 있던 것들, 그 모든 것이요. 기회예요.”
 
그에 재성이 따지듯 물었다.
 
“아... 무슨 예언처럼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과거를 떠올리는 것뿐이에요. 재성님도 가끔 그런 그럴 때가 있을 텐데요?”
 
“제가요?”
 
“그렇습니다. 재성님도 남다른 기억력을 가지셨습니다. 그게 기억이란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재성이 일어났다.
 
“후우, 이젠 진짜 나가야겠어요. 나가게 해주세요.”
 
그러자 여자가 이번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 자신감이 있었다. 재성은 그녀를 보며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그 친구가 미치지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 리가 있겠어? 괜한 시간만 낭비했네. 이 엉터리 같은 말에 내가 잠시 수긍을 했었다니...’
 
여자가 말했다.
 
“밖으로 나가시면, 23시 45분정도 될 겁니다. 약간의 문제 때문에요.”
 
재성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재성님께서 여기 들어온 시간이 23시 40분입니다. 들어오신 시간에서 어쩔 수 없이 5분 정도 늦어집니다. 양해바랍니다.”
 
“그래요? 확인해봐야겠네.”
 
재성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핸드폰이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손이 빨라졌다. 그러고 보니 메고 있던 가방도 사라지고 없었다.
 
“내 물건들 다 어디다 놨어요?”
 
“나타날 거예요. 밖에 나가시면...”
 
“뭐라고요? 아, 미치겠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 찾을 테니까요.”
 
여자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참고적으로 재성님께서 이곳에서 나가는 시간에서 대략 삼사십 여분이 지난 시간에 그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0시 22분 정도가 될 겁니다. 그 시간에 박상현님이 사망합니다.”
 
여자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일상대화를 하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분명, 사전에 말씀드린 셈이니, 증거는 충분히 되겠죠? 그때부터 재성님은 저의 제안에 대해 고민하십시오.”
 
재성은 저 말이 장난이든 실제든 어쨌든 기가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터였다.
 
“재성님은 제 연구를 위해 약간의 시간을 투자하면 됩니다.”
 
여자의 초록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저의 제안에 동의를 하신다면, 내일 다시 오십시오. 꼭 오시게 되겠지만...”
 
재성이 허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꿈이든 뭐든 간에, 금방 판가름 날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누군가의 죽음이 달려있다니, 뭘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여자가 느닷없이 재성의 몸에 기대었다.
 
“뭐죠?”
 
“가만히 계세요.”
 
재성의 고개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뒤로 처졌다. 어쩔 수 없이 재성도 그녀를 반쯤 안은 꼴이 되었다.
 
“이것도 필요한 의식이에요.”
 
녹아들 것만 같은 그녀의 목소리에 재성의 심장이 흔들렸다. 여자는 재성의 머리를 한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다가 자신의 얼굴을 재성의 입술 언저리로 가져왔다. 여자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녀가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키스를 허락해 주실래요?”
 
“이게 지금 무슨...”
 
하지만, 대답할 새도 없이 그녀의 촉촉한 입술이 재성의 입술에 닿았다.
재성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밀쳐내려 했지만, 그냥 시늉뿐이었다. 여자가 재성의 윗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깨물었다. 그 감촉이 재성의 몸속에 연기처럼 흘러들었다. 이윽고 치아가 부딪히며 서로의 것이 섞였다. 그녀의 타액 속에 망각의 기운이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게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냥 이대로 멈췄으면...’
 
재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능동적으로 반응했다.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와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그녀의 볼록한 가슴이 느껴지자 재성의 심장이 요동쳤다. 재성은 그녀를 더욱 꽉 안았다. 그러자 그녀가 재성을 밀치더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재성이 아쉬운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봤다. 초록빛에 비친 그녀가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끌어안고 싶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조금만 더...”
 
여자가 팔을 잡아당겼다.
 
“어차피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그리고 방긋 웃으며 재성의 옆에 걸쳐 앉았다.
 
“재성님은 이곳에 언제든 다시 오실 수 있어요.”
 
“어떻게요?”
 
“그냥 눈을 감고 이곳으로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세요. 어렵지 않아요. 하나도...”
 
“눈을 감고?”
 
“대신 지켜주셔야 할 것이 있어요. 지금 벌어진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비밀로 해주세요.”
 
“말해도 믿어줄 사람이 없어요. 이걸 누가 믿겠어요?”
 
여자가 검지로 재성의 입술을 막았다.
 
“지킬 수 있죠?”
 
재성이 대답 없이 장난스럽게 여자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여자의 얼굴이 돌연 차갑게 바뀌었다.
 
“만약 어기고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하시면, 재성님과 저와의 관계는 모두 정리가 될 겁니다. 그리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예요.”
 
순간 재성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여자의 표정이 금세 풀리더니, 다시 재성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것 하나만 지켜주시면, 아무 일도 안 벌어져요. 우린 또 만날 거고요.”
 
그녀의 목소리에 재성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할게요.”
 
“설령 다른 세상 사람들이 찾아와서 묻는다고 해도요. 아시겠죠?”
 
“다른 세상?”
 
“그래요.”
 
또 정적이 흘렀다.
 
“뭔지 모르지만, 꼭 그렇게 할게요.”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강한 거부감과 의심이 있던 재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했다.
 
“꼭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재성이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부드러운 미소로 응대하며, 손으로 한쪽 벽면을 가리켰다. 그러자 멀쩡한 벽이 갈라지더니 출입문이 생겨났다. 재성은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여자가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서 왼쪽으로 나가면 됩니다.”
 
재성이 머뭇거리자 여자가 재성의 팔을 붙잡고 그를 배웅했다. 반강제로 방 밖까지 밀려나간 재성이 여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여자의 마지막 얼굴을 볼 새도 없이 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곳엔 아무 장식도 없는 휑한 벽이 나타났다.
재성이 그녀가 말한 쪽으로 몇 걸음을 걸었다 싶었는데, 어느새 저택의 대문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빽빽한 나무와 숲이 보였다. 안채는 그것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 건물이 어디에 있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현실인 거야. 현실...’
 
안쪽으로 다시 몇 걸음 걸어 들어갔다. 미로 같은 숲길 속에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정원을 이리저리 헤매다보니, 신기하게 생긴 자주색 열매식물이 주변에 여기저기에 심어져있음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저택 안의 식물들 대부분이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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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성은 다시 발걸음을 바꾸어 대문 쪽으로 갔다. 재성이 다가서자 대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재성은 저택에서 나와 한적한 거리를 쳐다보았다. 괴이하게 생긴 회색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환상은 아니었다.
 
‘근데, 여기서 어떻게 가는 거야?’
 
재성이 그곳에서 두 서너 걸음을 걷기 시작했을 때, 처음에 그가 이 거리에 왔을 때처럼 눈앞이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때와는 다르게 의식이 완전히 끊어지진 않았다. 대신 이상한 빛의 터널을 엄청난 속도로 전진하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달팽이관이 터질 거 같을 정도로 괴이한 쇳소리가 커다란 음파에 섞여 들렸다. 재성은 이를 악물고 그걸 참아냈다. 힘들어하는 그의 입술 사이로 자주색으로 물든 그의 치아가 반짝였다.
 
한편, 재성이 나가자마자 여자는 들고 있던 검은색의 도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도구는 자기혼자 뱅그르르 돌더니 납작하게 바뀌었다. 여자는 그걸 손가락에 반지처럼 끼웠다. 그리고 자신의 입속에서 자주색의 열매를 꺼냈다. 그 열매는 화분에 열려있는 것과는 다르게 표면이 쭈글쭈글했으며 색이 연했다. 여자가 입술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잖아.”
 
 
 
* * *
 
 
 
재성이 눈을 감고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여전히 귀청이 터질 거 같은 소리와 함께 하얀색인지 푸른색인지 알 수 없는 수만 가지의 빛이 계속해서 그의 눈꺼풀을 스치고 지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타다다다다...”
 
마지막으로 달리던 롤러코스터를 멈추는 것처럼 사방이 심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고요해졌다. 그리고 몸이 휘청거렸다.
눈을 떠보니, 재성은 텅 빈 골목에 서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거긴 그 이상한 곳에 가기 전의 바로 그 공원 앞이었다. 둘러보니 현실이었다. 가로등도, 나무도...
 
“휴...”
 
재성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쪽을 바라봤다. 검은 그림자가 재성을 보고 있었다. 그에 재성은 깜짝 놀라 넘어질 뻔했다. 재성과 눈이 마주친 검은 그림자가 뒤쪽으로 달아났다. 그걸 보며 재성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가방끈이 만져졌다.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핸드폰이 잡혔다. 서둘러 꺼내보니 전원이 나간 상태였다. 자신을 뺨을 꼬집었다. 손가락의 압력이 그대로 느껴졌다.
 
‘꿈이... 아니었어. 그렇다면?’
 
핸드폰을 십여 초간 뚫어지게 쳐다보던 재성은 가방을 뒤져 보조배터리를 꺼냈다. 그리고 그걸 핸드폰에 연결하고 전원을 켰다.
 
‘마지막으로 그것만 확인하면...’
 
잠시 후. 재성이 눈이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렸다.
핸드폰이 가리키는 시간은 PM 11시 46분이었다. 날짜도 예전 그대로였다. 재성은 두근거리는 마음에 보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채 두 번도 가지 않아 전화를 받았다. 시끄러운 게임소리가 들렸다.
 
[ “그냥 간다고 하더니, 와이? 아쉽냐? 한 게임 더 하려고?” ]
 
“그게 아니고, 내가 거기서 나간 지 얼마나 됐냐? 몇 시간이나 흘렀어?”
 
[ “뭔 개소리?” ]
 
“혹시 말인데, 우리 오늘 만났냐? 어제 만났냐?”
 
[ “아씨, 장난쳐? 네가 나갈 때 시작했던 판, 아직도 하고 있다. 혼자 죽을 똥이잖아!” ]
“정말이야?”
 
[ “당연하지. 네가 없다고 게임이 단 몇 분도 안 되어서 끝날 줄 알았냐? 근데, 다시 오려고 전화 한 거 아냐?” ]
 
“미안하지만, 거기 벽시계 좀 확인해줄래? 시간을... 그리고 오늘 날짜가?”
 
[ “미친놈, 헛소리 그만해. 안 올 거면 끊어. 나도 겜 끝나고 집이나 가게.” ]
 
전화를 끊은 재성은 머리가 혼란스러워 가만히 서 있었다. 아직도 그 여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 이곳에서 재성님 시대의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단 1분도요.
- 재성님 시대의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않습니다.

...
 
“에잇!”
 
재성은 모든 것을 떨쳐 버리려는 듯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 앞에 서 있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에 앉아있던 어머니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일어났다.
 
“독서실에서 전화가 왔는데... 지금까지 어디서 뭐했어?”
 
“다른데서 공부했어요.”
 
“네가 갈 데가 어디 있니? 밥은?”
 
“친구들끼리 모여서 공부하는 곳이 있어요. 먹었어요. 피곤해요.”
 
재성은 힘없이 대답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가방을 침대 위에 던졌다. 그리고 그 옆에 벌러덩 누웠다. 힘든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전신이 뻐근하고 피곤했다. 재성은 손으로 입술을 만졌다. 아직까지 그녀의 촉촉함과 향취가 남아있는 듯했다.
그게 꿈이라도 좋다.
그렇게 눈을 감으려던 찰나. 재성은 다시 눈을 번쩍 떴다.
 
- 재성님께서 이곳에서 나가는 시간에서 대략 삼사십 여분이 지난 시간에 박상현님이 사망합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0시 22분 정도가 될 겁니다.
 
재성은 핸드폰 시계를 보았다. 11시 57분, 그 시간까지 정확히 25분 전이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재성의 안에서 양면(兩面)의 영혼이 서로 대결이라도 하듯 마구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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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동국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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