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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으로] 연 1조원 번 영업·행복부장 구마몬, 지진 아픔 달래는 힐링천사 됐어요

중앙일보 2016.10.01 00:11 종합 17면 지면보기
#“자, 나오세요!”

4월 대지진 발생 후 활동 중단하자
“구마몬 안전한가” 걱정 글 SNS 도배
5월 피해자들 위로하며 활동 재개
“재건과 부흥의 상징으로 거듭나”

가바시마 이쿠오(蒲島郁夫) 구마모토현 지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문이 열리고 둥글둥글 배불뚝이 검은 곰 한 마리가 등장하자 환호성이 터졌다. 구마모토의 ‘얼굴’ 구마몬이다. 지난달 1일 지진으로 발길이 끊긴 관광객 유치를 위한 홍보 일환으로 가바시마 지사가 한국 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진 자리였다. 지사의 공식 일정에 거의 함께하는 구마몬이 이날만큼은 “바빠서 참석할 수 없다”고 했었다. 캐릭터 천국 일본에서도 가장 성공한 캐릭터인 구마몬 취재가 무산된 줄 알았더니 깜짝 등장시켜 ‘구마몬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현(縣) 측의 설정이었다. 복구 상황과 지진 대책, 관광 할인 등에 대한 딱딱한 문답이 오가던 자리가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지며 마무리됐다.

#시간을 거슬러 지난 4월. 규슈 구마모토에서 규모 6.5와 7.3의 강진이 이어진 뒤 SNS엔 해시태그 ‘#prayforkumamoto’가 달린 글이 전 세계에서 올라왔다. 테러·재해가 발생하면 늘 등장하는 위로와 응원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 관심과 위로의 양상은 좀 달라졌다. “구마몬, 안전하니?” “구마몬! 무사해야 돼….” 지진 이후 종적을 감춘 구마몬을 걱정하는 글이 SNS를 도배했다. 블룸버그통신까지 SNS 반응을 소개하며 구마몬 안부를 묻기에 이르렀다. BBC도 “태국·홍콩에서도 구마몬을 걱정한다”는 뉴스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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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일 한국 기자들과의 간담회에 함께한 가바시마 이쿠오 구마모토현 지사(왼쪽)와 구마몬. [구마모토=홍주희 기자]

대체 구마몬이 뭐라고 재난의 절망과 복구의 희망 한복판에서 집중 관심을 받는 걸까.

구마모토는 규슈 내 다른 현(縣)에 비해 인지도가 낮았다. 더욱이 2011년 완전 개통한 규슈 신칸센의 종착역이 구마모토가 아닌 가고시마로 정해지자 위기감은 커졌다. 2010년 ‘구마모토 서프라이즈’라는 지역홍보 프로그램이 출범했고 그 과정에서 구마몬이 탄생했다. 가바시마 지사는 늘 구마몬을 데리고 다녔고, SNS를 적극 활용해 알렸다. 홍콩·중국 등 해외 홍보 활동에도 참가시켰다. 2013년엔 인간이 아닌 존재 최초로 하버드대 강단에도 섰다. 가바시마 지사가 ‘구마몬의 정치경제학’ 강연을 할 때였다. 그렇게 5년여를 달린 결과 지난해 구마몬은 캐릭터 상품으로만 1007억 엔(약 1조9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캐릭터데이터뱅크’가 실시한 호감도 조사에서는 53.6%를 기록해 헬로키티(47.3%)를 제쳤다. 트위터 팔로어 수는 53만 명에 육박한다. 지난해 구마모토 해외 관광객 증가율은 전년 대비 359%로 전국 1위를 차지했다.

구마모토 대지진은 그 진가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SNS로 일상을 공유하던 구마몬은 지진 당일인 14일 이후 활동을 중단했다. 가바시마 지사는 “복구에 지장을 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피해·복구 상황만큼이나 구마몬의 행방을 궁금해 했다. 특히 피해 지역의 아이들이 구마몬을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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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아키히토 일왕 내외를 알현한 구마몬. [구마몬 트위터]

구마몬은 어린이날인 5월 5일 피난소 방문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구마몬이 큰 피해를 본 니시하라무라(西原村)의 피난소를 찾아 노인과 아이들을 위로하는 사진이 아사히신문 1면과 공영 NHK방송 등에 보도됐다. 전국 각지의 구마모토 특산품 판매소에서 지원을 호소하고, 악수회를 열어 응원에 대한 감사도 표했다. 이런 구마몬의 활동은 눈에 띄는 성과로 이어졌다. 도쿄에 있는 구마모토 특산품 판매소에선 지진 이후 두 달간 방문객 수가 평소 2배, 매출은 3배가 늘었다. 가바시마 지사는 “구마몬이 재건과 부흥의 상징으로 거듭났다”고 말했다.

이처럼 구마몬이 돈 버는 효자에서 힐링 캐릭터로도 진화할 수 있었던 건 철저한 전략 덕이다. 구마몬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끊임없이 노출되면서도 신비주의를 고수한다. 인형 속에 누가 들어 있는지, 인형은 몇 개인지 공개하지 않는다. 2013년 구마몬을 만난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혼자 다 하고 있는 겁니까”라고 물었을 정도다.

구마몬은 인격을 가진 생명체로 활동한다. 당연히 갖가지 세세한 설정을 갖는다. ‘호기심 많은 장난꾸러기’라고 성격을 묘사하고, 디자인 개선에 따라 초기보다 펑퍼짐해진 몸매에 대해선 ‘구마모토의 맛있는 음식을 과식해 살이 쪘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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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현 구마몬의 집무실. [구마몬 트위터]

번듯한 직함도 가졌다. 영업부장 겸 행복부장. 지사·부지사를 잇는 서열 3위다. 외근을 주로 하지만 책상에 서류를 잔뜩 펼친 채 야근하는 사진도 SNS에 공개한다. 회의에 참석한 장면이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가바시마 지사는 ‘거짓말’도 한다. 지난 6월 선데이 마이니치 인터뷰에서 그는 구마몬의 지진 이후 활동 재개에 대해 “구마몬이 스스로 생각해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구마몬의 정체’가 궁금한 이는 많다. 오죽하면 스토커가 있을까. 공식적으로 구마몬 관련 업무는 ‘구마모토 브랜드추진과’ 소관이다. 일정 관리와 캐릭터 사용 허가 등을 담당한다. 5명이 3개의 인형을 번갈아 쓰고 활동한다는 건 비공식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효율성을 위해 곰 세 마리를 돌리지만 원칙은 있다. 절대로 동시에 두 곳에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알면서도 기꺼이 속아주게 만드는 비결이다.
 
‘구마몬 빨간 볼 분실사건’ 등 기발한 이벤트로 관심 끌어
구마몬의 인기 비결 중 하나는 ‘스토리텔링’이다. 신생 캐릭터를 알리기 위해 구마모토현은 기발한 이벤트들을 기획했다. 대표적인 것이 ‘오사카 실종사건’. 2010년 9월 구마몬은 명함 1만 장을 뿌리는 임무를 받고 오사카 출장에 나섰다. 그러나 이내 진절머리를 낸 구마몬은 가출했고, 구마모토현은 인터넷을 통해 이 사실을 알리고 “구마몬을 찾아 달라”고 호소했다. 가바시마 지사는 기자회견까지 열어 전국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2013년 10월에도 이벤트가 벌어졌다. 이른바 ‘구마몬 빨간 볼 분실사건’이다. 구마몬의 매력인 빨간 볼이 사라져 “그냥 곰이 돼버렸다”며 구마모토 사람들이 실의에 빠졌다는 설정으로 인터넷에 영상을 띄우고 전단지를 뿌렸다. 사흘간 인터넷을 달군 난리법석 뒤 구마모토현은 빨간 볼을 되찾았다고 발표했다. 빨간 볼이 발견된 곳은 구마모토현의 딸기·토마토·수박밭. 농업이 주요 산업인 구마모토의 붉은 농산물을 알리고자 했던 이벤트였다. 이후 신문·방송에 수십 건의 구마모토 농산물 보도가 이어졌고, 당시 언론은 그 광고 효과가 6억 엔(약 65억원)에 달한다고 전했다.

구마모토=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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