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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 시행 첫날…전국 곳곳의 풍경

중앙일보 2016.09.28 23:14
김영란법 시행 첫날 전국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변화가 나타났다. 한우전문점에서는 돼지고기 메뉴를 추가했다. 관공서 인근 식당은 한산했고, 공공기관의 구내 식당은 붐볐다. 돌잔치를 앞둔 공무원과 제자를 한 명이라도 더 취업시켜야 하는 교수들은 고민에 빠졌다.

대구에서 공무원 회식장소 1순위로 꼽히는 봉덕동의 A한우전문점 변모(27) 대표는 28일 메뉴판에 돼지고기 삼겹살ㆍ목살 등을 추가했다. 1인분에 2만~3만원이 넘는 한우만 팔아선 더 이상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해서다. 변 대표는 “김영란법 때문에 예약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며 “2만9000원짜리 메뉴를 만들게 아니라 부담없는 돼지고기를 같이 파는 게 살아남는 길”이라고 말했다.

30일 개업 예정인 대구시 도원동 B한우 전문점 주인 이모(37)씨는 “한우만 판매하는 식당으로 준비하다 부랴부랴 돼지고기 메뉴를 추가해 현수막을 다시 주문했다”며 “눈치보면서 밥도 편히 못 먹는 시대인만큼 살아남기 위해 ‘한우ㆍ돼지고기 전문점’으로 가게 운영 방향을 바꿀 생각”이라고 말했다.

28일 오후 12시 30분 대전시 서구 둔산동 대전시청 주변 J식당. 100여 석을 수용할 수 있는 테이블은 거의 비어 있었다. 주인 노현숙(57)씨는 “평소 100여 석이 다 찰 정도로 손님이 많았지만 오늘 점심때는 10% 수준인 10명 안팎이 왔다”며 “아무래도 김영란법 영향이 큰 것 같다”고 말했다. 삼계탕을 주로 파는 이 음식점의 메뉴는 1만~2만원이었지만 김영란법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노씨는 “김영란법에 대비해 음식값을 내리는 것도 한계가 있어 어떻게 가게를 꾸려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이 식당을 포함해 대전시청 주변 식당가는 이날 점심시간임에도 대부분 한산한 모습이었다. 반면 대전시청 구내식당은 평소보다 북적였다. 평소 600여명이 찾는 대전시청 구내식당에는 이날 700여 명이 찾았다. 대전시청 관계자는 “앞으로 구내식당 식사 제공량을 더 늘려야겠다”고 말했다.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한 뒤 지난 19일 다시 문을 연 인천시청 지하 1층 구내식당은 이날 오전 11시30분부터 이용객들로 북적였다. 평소 600~700여 명이던 이용객 수가 900여 명으로 늘었다. 인천시는 청사 로비에 카페도 만들었다. 카페 관계자는 “이용객의 상당수가 각자 카드 등으로 계산했다”고 말했다. 정창래 인천시 총무과장은 “청사 내 카페는 시청을 찾는 시민과 민원인들이 쉴 곳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김영란법 시행으로 공무원들이 괜한 구설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반면 시청 주변 식당가와 카페 등은 한산했다. 인천시청 인근에 있는 38년 된 한우 전문 음식점 ‘옛날주물럭집’은 오는 30일 문을 닫기로 했다. 한우 암소만 취급하는 이 식당의 메뉴 가격은 1인분에 3만8000원, 4만7000원, 5만3000원 등 세 종류다. 비싼 메뉴에도 주변에 시청과 인천지방경찰청 등이 있어 공무원들이 자주 이용했다. 하지만 김영란법 시행되면서 고기값을 맞출 수 없어 결국 문을 닫기로 했다고 한다.

식당 관계자는 “하루 평균 15건 정도였던 예약 손님도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뚝 끊겼다”며 “저렴한 가격의 메뉴 등을 개발하고 리모델링한 뒤 추후에 다시 문을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영란법’ 시행 첫날 강원 횡성축협이 1인분에 2만4000원짜리 횡성 한우 메뉴를 선보였다. 횡성축협이 28일 공개한 신메뉴는 횡성한우 등심 100g과 야채를 다져 넣은 65g짜리 스테이크 1개 등으로 구성됐다. 2000원 하는 된장찌개와 밥 한 공기, 3000원짜리 소주 1병을 시켜도 한 사람 식사 비용이 2만9000원이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김영란법)에서 정한 식사비 3만 원을 넘지 않는다. 횡성축협 한우프라자에서 500g짜리 등심(1++)을 7만 원에 내놓은 것과 비교하면 저렴한 가격이다. 이 메뉴는 횡성한우프라자 본점과 우천ㆍ새말ㆍ둔내점, 인천 계양점 등 횡성한우프라자에서 판매될 예정이다. 정주열 횡성한우프라자 점장은 “김영란법으로 횡성 한우가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예상해 법에서 정한 고시액을 넘지 않는 신메뉴를 개발하게 됐다”고 말했다.

졸업하는 제자들을 한 명이라도 더 취업시켜야 하는 지방대 교수들도 김영란법 시행으로 고민에 빠졌다. 영남대 C교수는 28일 “큰일났다. 제자 취업 부탁도 이제 부정청탁이 된다.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취업에 교수가 도움을 줄 수 없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매년 취업 때면 제자들이 대기업 등에 지원해 서류심사 등 1차 관문을 통과하면 어떻게든 아는 사람을 찾아내 전화로 “제자 누구가 면접 보러 간다. 이런 장점이 있는 학생이다. 잘 부탁한다”며 선처를 요청해 왔다. 그런 부탁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C교수는 “대학이 교수를 평가할 때 취업 실적은 절대적”이라며 “앞으로 청탁을 할 수 없으면 편하긴 하지만 취업실적 평가는 여전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고 걱정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가 1차 통과하고 면접에 올라갔다’ 정도만 말해 볼까 생각 중이다.

8급 공무원 A씨(38)는 올해 말 첫 딸의 돌잔치를 앞두고 요즘 고민이 깊다. 150명으로 행사장을 예약해둔 상태인데 경조사에 돌잔치가 포함되지 않다 보니 행여나 문제가 될지 모르면 서다. ‘돌잔치=사교ㆍ의례’에 해당해 평소 알고 지내던 유관기관 관계자들로부터 5만원 짜리 선물(무기명 유가증권인 상품권)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아예 친인척만 초대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상품권으로 돌잔치 행사비용 보태지 못해 받는다 처도 어떻게 써야할지 골치다. A씨는 “그동안 유관기관 지인들에게 줬던 돌잔치 축의금은 포기해야 할 듯”이라고 말했다.

대구ㆍ대전ㆍ횡성·부산ㆍ인천·수원=송의호ㆍ김윤호ㆍ김방현ㆍ최종권·강승우ㆍ최모란·김민욱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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