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 기록표. 유 열사는 투옥 이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1년여 만에 순국했다. [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
그러나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고 이를 기리는 것은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그런 점에서 96년 전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유언이다. 1920년 9월 28일, 유관순 열사는 겨우 18세의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의 차가운 지하 감방에서 순국했다.
당시 일본 경찰의 가혹한 고문으로 유관순 열사의 방광은 파열돼 있었다. 일제 당국은 갖은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에 시달린 유관순 열사의 치료를 거부하고 방치했다.

학생 시절 유관순 열사의 사진
1919년 3월 1일에는 이화학당 선생님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담을 넘어 서울 시내의 시위운동에 합류했다.
독립운동의 열기가 거세지자 조선총독부는 임시휴교령을 내렸고 유관순 열사는 고향인 충남 천안으로 내려갔다.
3월 14일 목천보통학교의 학생 시위 이후 잠시 주춤했던 지역 독립운동의 불씨를 다시 살린 건 유관순 열사였다.
유관순은 인근 유림대표와 큰 가문의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시위운동에 나설 것을 적극 설득했다. 그녀는 거사 당일 사람들에게 나눠 줄 태극기도 직접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마침내 4월 1일 오후 1시 3천여 군중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유관순 열사는 태극기를 흔들며 앞장섰다.
이날 시위엔 유관순 열사의 부모도 참여했는데 모두 시위 현장에서 순국했다. 열사의 아버지인 유중권은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며 일본 헌병에 항의하다 총검에 찔려 순국했고, 이를 보고 달려든 어머니도 일본 헌병에게 학살당했다.

그녀는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다.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라며 일제의 재판을 거부했다.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서도 유관순은 계속해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심한 고문을 당했다. 1920년 3월 1일에는 3·1운동 1주년을 맞아 감옥안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선도하기도 했다.
갖은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으로 옥사한 유관순 열사는 순국 뒤에도 일제의 만행으로 고통받았다. 열사의 유해는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1930년대 일제의 무분별한 군용지 개발로 사라졌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
대한민국정부는 유관순 열사의 공훈을 기리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박범준 인턴기자 park.beomjune@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