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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파라치 움직임 파악하라’ 학원에 직원 보낸 기업들

중앙일보 2016.09.28 02:31 종합 5면 지면보기
“원래 날씨가 선선해지는 요맘때는 손님이 좀 느는데 오늘은 파리만 날리네요.” 27일 저녁 서울 종로구 내자동 서울경찰청 인근의 N 한정식집 주인 유모(57)씨가 말했다. 유씨에 따르면 이날 저녁 예약 손님은 두 팀뿐이다. 28일에는 그마저도 없다. 유씨는 “헌법재판소에서 김영란법 합헌 결정할 때부터 손님이 줄기 시작했다. 2주 전 2만9000원짜리 정식을 내놨지만 소용이 없다. 진짜 불황은 이제 시작인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인근 식당 주인들도 지난해에 비해 매상이 확연히 감소했다고 입을 모았다.
기사 이미지

란파라치 학원은 27일 서울 서초동의 한 사설 ‘란파라치(김영란법+파파라치)’ 학원에서 수강생들이 강의를 듣고 있다. 이 학원은 김영란법 시행에 따른 포상금과 신고 요령 등의 내용을 알려준다. [사진 오상민 기자]

이처럼 김영란법 시행 전야(前夜)의 관공서 주변 고급 식당가의 풍경은 전반적으로 한산했다. 그런 가운데 “최후의 만찬을 즐기자”며 이날로 모임을 당긴 이들도 있었다. 서울의 한 경찰서는 서장과 간부들이 참석하는 협력단체와의 모임 일정을 바꿔 이날 진행했다. 회식으로까지 이어지는 행사다. 경찰서 관계자는 “김영란법 때문에 연말까지 나눠서 진행할 일들을 지난주와 어제·오늘에 몰아 치렀다”고 말했다. 일부 기업체의 홍보·대관 업무 담당자들은 친한 공무원이나 기자들에게 이날 ‘번개 모임’을 제안하기도 했다.

관계·재계 시행 전야 풍경
관공서 인근 식당가 이미 썰렁
일부선 “최후의 만찬” 번개 모임도

약속을 일부러 피하고 예행연습을 하거나 대응 전략을 짜는 곳도 있었다. 중견기업 홍보실장 이모(46)씨는 “점심은 직원들과 햄버거로 해결하고 미리 준비하는 차원에서 저녁 약속도 잡지 않았다.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하게 될 것 같아 퇴근 후 헬스클럽을 알아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4대 그룹 계열사인 한 대기업 관계자는 “대관·홍보 담당자들은 28일 이후 저녁 약속을 한 건도 잡지 않는 대신 오후 2~5시쯤 언론사나 국회 사무실을 찾아가 업무를 진행하는 전략을 짰다”고 했다. 한 기업체 관계자는 “직원을 이른바 ‘란파라치 학원’에 보내 그들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파악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란파라치 학원은 김영란법 위반 적발자를 찾아내 신고하는 요령을 알려주는 사설 업체다.

정부 부처나 국회에도 ‘초반에 걸리면 평생 회자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조심하는 분위기가 퍼졌다. 정부세종청사 인근에는 이날 점심시간 외부로 나온 공무원이 평소보다 줄었다. 한 한우고깃집 사장은 “불편해서인지 평소보다 30~40% 자리가 남았다”고 말했다.

28일 외신기자 오찬간담회를 갖는 정세균 국회의장 측은 참석 예정 기자들에게 “김영란법 시행으로 내일 기자단 식대는 개별 지출이 원칙이다. 식대는 3만3000원이다”고 공지했다. 또 국회 국토교통위의 경우 인천공항공사에서 오전 국정감사를 마치고 점심으로 2만5000원짜리 도시락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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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은 공공기관의 공식행사 모습도 바꿔 놓았다. 가평군은 다음달 1일 제13회 자라섬 국제재즈페스티벌 개막식을 예년과 달리 조용히 치르기로 했다. 지난해까지 개막식 무료 초청장을 300여 명에게 보냈지만 이번엔 장관과 경기도지사, 시장·군수 등을 초청하지 않았다. 가평군 관계자는 “김영란법 시행으로 1인당 5만5000원인 입장권을 공짜로 제공할 수 없어 결정한 고육지책이다”고 말했다.

글=이지상·홍상지·윤정민 기자, 가평=전익진 기자 yunjm@joongang.co.kr
사진=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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