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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30 - 예수는 보이는데, 예수 안의 신은 왜 안 보이나

[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30 - 예수는 보이는데, 예수 안의 신은 왜 안 보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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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당시에도 그랬다. 사람들은 ‘안’보다 ‘밖’을 보기를 즐겼다. ‘나’보다 ‘남’을 논하기를 더 좋아했다. 그런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했을까. 급기야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7장3절)


티는 아주 작은 티끌(mote)이다. 들보는 기다란 목재 기둥(beam)이다. 내 눈 속에 그런 기둥이 박혀있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아프고 불편할까. 뿐만 아니다. 들보로 인해 나의 시각이 왜곡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된 시각’이 나의 눈이 된다. 가족을 대하고, 이웃을 대하고, 세상을 대하는 잣대가 된다. 그런 잣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우리는 불같이 화를 낸다. 남의 눈에 낀 티끌 하나에도 분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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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작 ‘예수의 초상’. 1648~54년에 제작됐다. 예수의 눈이 참 맑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주겠다”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누가복음 6장41~42절)

나는 성경을 펼칠 때마다 가슴이 멎는다. 예수는 정확하다. 참 놀랍다. 더하는 일도 없고 빼는 일도 없다. 그래서 가차(假借)없다. 예수 당시에도 ’메시아‘를 자청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남의 눈에서 티를 빼려고 했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내가 네 눈 속의 티를 빼주겠노라.“ 이런 장면이 예수의 눈에는 얼마나 희극적이었을까. 큼직한 들보가 박힌 눈으로 남의 눈을 훑으며 티끌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비단 ’가짜 메시아‘들만이 아니다. 예수의 지적은 ’들보가 박힌 눈‘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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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올드시티의 시장통.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가게가 골목 양옆에 이어져 있다.

예루살렘의 햇볕은 따가웠다. 나는 올드시티(구 시가지)의 시장통으로 갔다. 그곳은 팔레스타인 구역이다. 시장에서 가게를 하는 이들은 모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다. 시장통 곳곳에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방탄 조끼를 입고 완전 무장을 한 채 순찰을 돌고 있었다. 이 시장의 골목은 각별하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형장을 향해 걸어간 곳이다.

석류 주스를 파는 가게가 곳곳에 보였다. 어른 주먹만한 석류를 수동식 기계로 누르면 ’주루룩‘하고 주스 한 잔이 나왔다. 나는 그늘진 테이블에 앉아서 주스를 마셨다. 시원하고 상큼했다. 그렇게 더위를 식히며 생각에 잠겼다. ”그럼 이 들보를 어떻게 해야 뽑을 수 있을까? 예수는 분명히 그 해법을 설했을 터이다. 그게 성경 속에 녹아 있을 것이다. 그게 과연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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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순찰을 돌고 있다. 올드시티의 시장통은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었던 곳이다.

들보의 뿌리는 깊다.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어디까지? 아담과 이브까지. 인류의 눈에 처음 들보가 박힌 순간은 언제일까. 세상을 삐뚤게 보기 시작한 순간은 언제일까. 그렇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이다. 그때 이들의 눈에 들보가 박혔고, 그 들보를 중심으로 선과 악을 쪼개기 시작했다. 그럼 어떡해야 ’들보‘를 다시 뽑을 수 있을까. 예수의 해법은 대체 뭘까.

예수는 분명하게 말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복음 10장38절)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장27절) 누차 강조했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말이다. 그걸 외면하면 “나의 제자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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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의 1578년 작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 프라도 미술관 소장.

어찌 보면 너무 한다. 예수를 믿는 이들은 다들 ’예수의 제자‘를 자처한다. 아니면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갈망한다. 주일을 지키고, 교회에 출석하고, 십일조 헌금을 내고, 식사 때마다 기도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는 달리 말했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못박았다. 그러니 이유가 있다. 주일을 지키는 데는 이유가 있다. 교회에 출석하는 데도 이유가 있다. 십일조를 내는 데도, 식사 때마다 기도를 하는 데도 이유가 있다. 그게 뭘까. 자기 십자가다. 그걸 어깨에 올린 채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다.

목회자들조차 “설교할 때 ’자기 십자가‘를 말하면 성도들이 부담스러워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는 왜 굳이 ’십자가‘라는 부담을 주려고 했을까. 거기에는 깊은 이유가 있다.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통과할 때 들보가 부서지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몸소 걸어갔다는 시장통의 계단.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십자가‘를 꺼린다. ’십자가=고통‘이라고 생각한다. 안에서 물음이 올라왔다. “자기 십자가는 정말 고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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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로 독창적인 종교화를 그렸던 티치아노의 1565년 작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

아름다운 시구(詩句)로 가득 찬 불교 경전 『법구경(法句經)』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평생 동안/어진 사람을 가까이 모셔도/진리를 알지 못한다/숟가락이 국 맛을 모르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잠깐 동안/어진 이를 가까이 모셔도/재빨리 진리를 이해한다/혀가 국 맛을 알듯이.‘

그럼 ’들보가 눈에 박힌 사람‘은 숟가락일까, 아니면 혀일까. 그렇다. 숟가락이다. 국 맛을 모르는 딱딱한 숟가락이다. 숟가락은 아무리 찍어 먹어도 맛을 모른다. ’예수의 맛‘을 모른다. 성경의 맛, 영성의 맛을 모른다. 눈에 박힌 들보로 인해 ’영성의 미각‘이 마비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다. 딱딱한 숟가락이 자신을 무너뜨리게끔 말이다. 그래서 유연하고 피가 도는 혀가 되라고 말이다. 국 맛을 아는 혀, 예수의 맛을 아는 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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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시티의 시장통에서 빵을 파는 팔레스타인 청년. 빵을 잔뜩 쌓은 받침대를 머리에 이고 있다.

나는 다시 묻고 싶다.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는 고통일까, 아닐까?” 아니다. 그럼 뭘까. 딱딱한 우리를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문(門)이다. 국 맛을 모르는 숟가락에게 국 맛을 아는 혀가 되게 하는 문(門)이다. 그러니 ’자기 십자가=고통‘의 등식은 틀렸다. 그건 십자가의 정체를 모르는 이들이 꾸려낸 착각의 등식이다.

성경에는 ’숟가락과 혀‘에 대한 일화가 있다. 예수의 제자 필립보(빌립)가 졸랐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하느님)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필립보는 왜 졸랐을까.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하느님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예수를 졸랐다. 단 한 번만 보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런 제자를 향해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요한복음 14장9~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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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의 화가 피터르 브뤼헐(1525~69)의 1564년 작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 그림 가운데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가 보인다.

필립보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눈 앞에 서 있는 예수를 보고 또 봐도 예수만 보일 뿐이다. 그 안에 깃든 하느님은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의 눈에 들보가 박혀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눈은 다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훤히 본다. 이유가 뭘까. 예수의 눈에는 들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뚜렷이‘ 보인다.

나는 예수의 지적을 다시 곱씹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누가복음 6장42절) 나는 이 구절을 묵상했다. 그러다가 ’뚜렷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그리스어 성경에는 ’diablepseis‘라고 표기돼 있다. ’뚫어서 보다(Thru+look)‘는 뜻이다. ’관통해서 보다‘는 의미다. 무엇을 관통해서 무엇을 보는 걸까. 그렇다. 예수를 관통해서 그의 안에 깃든 ’신의 속성‘을 보는 거다. 그게 ’뚜렷이‘의 깊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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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로니무스 보스 작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온갖 표정의 군상 속에서 십자가와 함께 예수만 고요하게 있다.

그럼 이제 ’자기 십자가‘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건 고통이 아니다. 세상을 뚫어서 신의 속성을 보게 하는 눈이다. 그 눈으로 진입하는 통로의 이름이 ’자기 십자가‘다. 예수는 그걸 우리에게 건넸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장27절)고 말한 이유가 명쾌해진다. ’예수의 눈‘을 좇는 이가 예수의 제자다. 들보를 뽑아내지 안고선 ’예수의 눈‘에 다가설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는 몇 번이나 강조했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아니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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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로니무스 보스 작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예수의 모습이 그림 속에서 가장 평화롭다.

이슬람 신비주의 영성가 루미가 쓴 ’나는 작은데‘라는 시(詩)가 있다. 넉 줄짜리 짤막한 시다. 이 시는 ’들보가 빠진 눈‘을 노래하고 있다. 그 눈이 얼마나 큰 눈인지 말이다.

’나는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작은데
이 큰 사랑이 어떻게 내 몸 안에 있을까?

네 눈을 보아라, 얼마나 작으냐?
그래도 저 큰 하늘을 본다.‘

<이현주 목사 역 『루미 시초(詩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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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갔던 골목을 순례객들이 걷고 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에 살았던 예수는 ’작은 인물‘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를 ’갈릴리 촌놈‘으로 여겼다. 예수는 그저 나사렛 시골에서 자란 목수의 아들이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볼 품 없었다. 고기 잡는 어부와 천대받는 세금징수원(세리) 등이 고작이었다. 예수는 수천 년간 내려오는 유대의 율법을 마음대로 어기고, 유대인들이 ’오랑캐‘쯤으로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들과 어울리고, 매춘부나 간음하는 여인 따위를 감싸고 돌았다. 유대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들보가 박힌 눈‘으로 보면 그랬다.

’들보‘를 빼면 달리 보인다. 예수의 작은 몸 안에는 ’큰 사랑‘이 들어가 있다. 우주를 품는 무한(無限)의 사랑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런 무한의 우주, 무한의 하늘을 우리의 작은 눈으로 볼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강조했다. 눈에 박힌 들보를 뽑으라고. 그걸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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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화가 도메니코 잠피에리(1581~1641)의 작품.

예루살렘의 시장 골목을 걸었다. 루미의 시와 예수의 메시지를 곱씹었다.

“네 눈을 보아라, 얼마나 작으냐?
그래도 저 큰 하늘을 본다.”


이런 눈을 가질 때 비로소 보인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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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1631년 작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31회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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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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