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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바로 보는 북한] 핵실험 해놓고…“해방 후 첫 대재앙” 수해지원 요청한 북한

중앙일보 2016.09.27 01:31 종합 1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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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말 강타한 태풍 라이언록의 영향으로 최악의 수해를 입은 함북 온성군 남양노동자구.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사망 138명, 실종 400여 명, 이재민 6만8900여 명의 피해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RFA 홈페이지]

평양의 관영매체에는 요즘 “모든 역량을 북부지대 큰물 피해 복구전선으로!”라는 식의 선전·선동이 넘쳐납니다. 26일자 노동신문 1면에는 “피해복구 전투는 우리의 귀중한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적대세력들과의 치열한 계급투쟁”이란 섬뜩한 주장까지 실렸습니다.

핵실험 전엔 ‘15명 행방불명’ 보도
열흘 뒤 ‘수백명 인명피해’ 밝혀
‘무작정 돕자’는 감상주의 벗고
북 주민 제대로 지원할 방안 짜야

수마(水魔)가 북한 두만강변 북부지역을 할퀴고 지나간 건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2일 사이라고 합니다. 10호 태풍 라이언록은 함북 경흥군과 부령군에 닷새간 각각 320㎜와 290㎜의 비를 뿌렸는데요. 두만강 유역 관측이래 가장 큰 수해로 함북 회령시와 무산군·연사군은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3일 첫 보도에서 “회령시에서만 15명이 행방불명됐다”고 전했는데요. 14일에는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포함한 인명 피해는 수백명에 달한다”고 공개했습니다. “해방후 처음있는 대재앙”이란 설명도 곁들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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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국제사회에 지원을 호소하고 나섰는데요. 유엔대표부를 통해 미국의 구호단체들에게까지 긴급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북한 외무성도 지난 14일 몽골과 베트남을 비롯한 아시아 9개국 평양주재 대사를 불러 설명회를 가졌죠. 세계식량계획(WFP) 등 북한에서 활동하는 기구들도 유엔 중앙긴급구호기금(CERF)을 요청하는 등 부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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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북지원 단체들도 팔을 걷고 부쳤습니다. 국내 59개 단체가 참여하는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는 북한과의 직접 접촉이 여의치 않자 국제기구를 통한 우회지원 쪽으로 검토 중인데요.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민화협)는 방한복 지원에 나서는 등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가로막는 복병(伏兵)이 나타났습니다. 북한의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인데요. 그의 핵·미사일 도발은 지원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모양새가 됐죠. 5차례 핵실험 중 3번이 그의 집권(2012년12월) 이후 이뤄졌고, 올들어서만 모두 22기의 미사일 시험발사를 감행하는 등의 집착이 문제인데요. 특히 최악의 수해를 보고받았을 시점인 지난 9일 5차 핵 실험 버튼을 눌렀다는 건 비난받을 대목입니다. 대북지원 단체 관계자는 “수해지원을 한창 논의하던 회의 자리에서 핵실험 소식을 듣고 참석자들이 아연실색했다”고 귀띔합니다.

민생을 강조해온 김정은은 수해현장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핵·미사일 기술자와 기념촬영 행사를 하고, 최고급 SUV차량인 레인지로버를 타고 평양 인근 협동농장에 나타나기도 했죠. 23일에는 수해 현장과 인접한 삼지연 군에서 대형 에드벌룬들을 띄우고 군중을 동원해 김정일 동상 제막식을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통일부는 대북지원 허용은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수해 지원을 할 경우 그 공(功)이 다 독재자인 김정은에게 돌아간다”(23일 정준희 대변인 브리핑)는 언급에서 분위기가 드러나는데요. 핵 실험때까지 피해상황을 감추던 북한이 다음날인 10일 노동당 호소문을 내 지원을 요청하는 건 골든타임을 의도적으로 흘려보낸 용납못할 처사란 설명입니다.

북한의 과거 행태도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망·실종자가 500명을 넘었던 2012년여름 수해 때 이명박 정부가 지원의사를 밝히자 북한은 “남측의 계획 수량과 품목을 알려달라”고 답했죠. 정부는 밀가루 1만톤(25톤 대형트럭 400대분)과 라면 300만개, 의약품과 구호물품 등 100억원 어치를 준비했는데요. 북측은 내심 원했던 쌀과 시멘트가 빠지자 “보잘것 없는 물자로 우리를 심히 모독했다”며 걷어차버렸죠. 북한은 2011년에도 우리 정부가 영유아 유아식 140만개와 라면 160만개 등을 지원하려하자 “쌀과 시멘트를 통크게 지원해달라”며 불발시켰습니다.

고통받는 북녘 동포를 돕자는 인도적 취지에 반대할 사람은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집권 5년차 동안 드러난 북한 최고지도자의 행태 때문에 국민여론은 싸늘하게 식어버렸습니다. 복지 시설의 원장이 지원금을 빼돌려 자신의 배만 불리고, 인권유린을 일삼는데도 무작정 후원금을 내라는 건 난센스란 인식이 깔린겁니다. 우선 시스템을 바로잡지 않으면 밑빠진 독에 물붓기인 셈이죠.

어쩌면 김정은의 관심사는 이번 수해로 떠내려가버린 두만강변 탈북자 감시초소와 철조망일지 모릅니다. 살림집이나 공장·농지보다 복구 우선순위에 꼽힐 수 있다는 얘기죠. 대북지원을 주장하는 우리 단체·인사들도 무작정 돕자는 식의 감상(感傷)적 접근에서 벗어나, 북한 주민을 제대로 지원할 방안을 정부 당국과 짜냈으면 합니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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