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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선진국, 하지만

중앙일보 2016.09.27 00:39 종합 2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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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판사·『개인주의자 선언』 저자

날이 선선해지자 자전거에 눈길이 갔다. 시작은 서울시 공공자전거 ‘따릉이’. 1000원을 결제하면 24시간 내내 자전거를 사용할 수가 있다. 다만 특정인의 자전거 독점을 막기 위해 한 시간 내에 다른 대여소에 반납하고 다시 빌려야 한다. 한 시간이 너무 짧으면 2000원을 내고 2시간 동안은 계속 사용할 수도 있다. 흥미를 느끼고 퇴근길에 이용해 봤다. 지하철역에서 빌려 바구니에 서류가방을 올린 후 페달을 밟으니 곧바로 한강. 네이버 지도의 자전거 길찾기로 어디서 한강으로 접근하기 쉬운지, 어디서 반납하면 될지 검색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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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운은 한강이다. 세계 어느 도시에 가 봐도 도시를 가로지르는 이런 큰 강은 드물다. 센 강처럼 소박한 물이 아니라 작은 바다처럼 호쾌한 물을 두 눈 가득 마시면서 자전거길을 달린다. 여름 내내 사무실 컴퓨터 앞에 갇혀 있다가 온몸을 자연스럽게 어루만져주는 초가을의 강바람을 맞으며 대도시 하늘을 조금씩 물들이는 노을을 보니 출소한 듯 해방감이 든다. 가지를 풍성하게 늘어뜨린 버드나무, 한가롭게 펼쳐진 잔디밭, 대여소에서 윈드서핑 보드를 빌려 들고 강으로 내려가는 소년들 사이를 지나며 호주의 브리즈번을 떠올렸다. 브리즈번 강변에 있는 시민의 휴식 공간 사우스뱅크를 걸으며 이들이 누리는 삶에 질투를 느꼈었는데, 어느새 우리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시민의 공간을 늘려 가고 있었다. 하버드 학생들이 레가타 연습을 하는 미국 보스턴 찰스 강변의 가을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사무실에 앉아 먼 곳의 아름다움만 추억하는 사이에 시민들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일상으로 즐기고 있었다.

서울숲 옆을 지나고 중랑천을 건너고 봉준호의 괴물이 둥지를 치고 있을 듯한 교각들을 지나 한강을 건넜다. 샛강생태공원의 습지를 구경하고 밤에 더 아름다운 여의도 물빛광장 분수대에 이르니 아이들이 물을 첨벙대며 놀고 있었다. 국민소득이 얼마다, 금메달을 몇 개 땄다, 수출을 얼마 했다 늘 들어도 몰랐는데 한강을 자전거로 달리고 보니 우리도 모르는 새 우리는 정말로 ‘선진국’이 돼 있었다. 수백억원씩 버는 사람들과 섞어서 나눈 평균 숫자가 아니라 물 맑은 강과 나무, 잔디밭, 공원, 길, 함께 쓰는 자전거가 비로소 그렇게 느끼게 해 주었다. 남은 건 방방곡곡 누구나 원하면 해 질 녘에 강으로 나와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하지만 다 같이 누리고 있지는 못한 이 ‘선진국’이란 놈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아닐까.

문유석 판사·『개인주의자 선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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