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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 아들이 처음 명작 소설 읽었다는 학부모 말에 뿌듯

중앙일보 2016.09.26 00:41 종합 25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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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독서 멘토 박소선(왼쪽)씨가 발달장애인과 함께 ?O. 헨리 이야기?를 읽고 있다.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글씨를 크게 하고 문장을 짧게 재구성한 책이다. [사진 피치마켓]

24일 오전 서울 서대문의 독립공원. 공원 한 쪽에 마련된 20여 개의 탁자에 발달장애인과 대학생, 사회복지사 등 60여 명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책을 읽고 있었다.

사회적 기업 피치마켓 함의영 대표
발달장애인 이해 쉽게 소설 등 재구성

“수와 존시는 예술가예요.” 소리 내어 책을 읽던 김모(발달장애 2급)군에게 대학생 멘토가 “예술가가 뭐예요?”라고 묻자 고민하더니 “가난한 사람”이라고 답했다. 이들이 읽고 있는 책 표지에는 『O. 헨리 이야기』(오 헨리)라는 제목과 ‘특별한 사람을 위한, 꼭 필요하지만 세상에 없었던 책’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책을 펼쳐보니 글씨는 큼지막하고 문장 길이도 대부분 다섯 단어를 넘지 않을 정도로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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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소설과는 많이 다르죠? 문장구조를 최대한 단순화하고 이야기하듯 대화체로 풀어서 썼어요.” 이날 발달장애인을 위한 일일 독서 동아리 행사를 주관하고 책도 준비한 함의영(34·사진) 피치마켓 대표의 설명이다. 피치마켓은 국내에선 처음으로 발달장애인을 위한 책을 출간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명작 소설이나 에세이를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기 쉽게 재구성하고, 삽화도 넣는다. 지금까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레프 톨스토이), 『O. 헨리 이야기』를 출간했고, 다음달 5일엔 세 번째 책 『어머니』(알퐁스 도데)를 내놓는다.

“발달장애인은 성인이 돼서 선거권을 가져도 공약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의미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이들에게 독서를 통해 사회를 이해하는 동시에 글을 읽는 즐거움을 주고 싶었죠.”

국내에 등록된 정신지체·뇌성마비 등의 발달장애인은 20만 명. 하지만 미등록자를 합치면 80만 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다. 함 대표는 2014년부터 뜻이 맞는 지인들과 함께 퇴근 후 책을 다시 쓰는 일을 시작했다. 1년간의 작업 끝에 지난해 1월 내놓은 첫 번째 책이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다. 반응은 뜨거웠다. “한 학부모는 발달장애 중학생 아들이 지금까지 동화책만 5000권을 읽다가 처음으로 명작 소설을 읽었다며 고마워하더군요. 40년 만에 처음으로 책을 읽었다는 발달장애인도 있었어요.”

유엔환경계획 한국위원회에서 일하던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지난해 4월 피치마켓을 설립했다. 본격적으로 발달장애인을 위한 책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회사명은 정보의 균형을 이룬다는 뜻의 경제용어에서 따왔다. 시행착오도 많았다. 책을 인쇄하고도 ‘인상이 날카롭다’는 문장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와서 ‘무섭게 생겼다’로 표현을 바꿔 다시 찍기도 했다. 지금은 발달장애인들을 만나 수십 번의 감수 작업을 거친다. 책 내용을 쉽게 바꾸면서도 원작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어머니』의 글쓰기 작업에 참여한 홍성훈(24)씨는 “독자가 다르다 보니까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문학적 접근이 필요했다”며 “제한된 어휘 속에서 최대한 문학적인 표현을 하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피치마켓은 이달부터 서울시와 협력해 학교 내에 장애학생과 급우들이 함께 참여하는 독서 동아리를 만들기로 했다. 함 대표는 “사랑에 대한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알퐁스 도데의 『별』과 한국의 설화집인 『어우야담』 등을 올해 안에 출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글=천권필 기자, 사진=김춘식 기자 fee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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