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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영국 총리의 화이트 셔츠

중앙일보 2016.09.25 20:58 종합 31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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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뉴욕을 시작으로 런던·밀라노·파리로 이어지는 이른바 세계 4대 패션위크는 더 이상 패션업계만의 행사가 아니다.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것을 활용해 때론 노골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국 민주당의 첫 여성 대선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을 위한 뉴욕 모금 패션쇼가 그랬고, 런던 패션위크 바로 전날인 지난 15일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다우닝 10번지 총리 공관에서 공개적으로 연 파티가 그랬다.

 이날 행사에는 영국을 대표하는 패션 디자이너 비비언 웨스트우드와 영국의 글로벌 브랜드 버버리의 크리스토퍼 베일리 최고경영자(CEO) 등 거물들뿐만 아니라 패션산업에 종사하는 견습생과 패션학교 장학생 등도 여럿 초청됐다. 영국 언론들은 이를 단순한 구색 맞추기가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것으로 해석한다. 지난 6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 이후 불거진 영국 패션산업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행보라는 것이다.

 실제로 메이 총리는 이 자리에서 “패션산업은 영국 경제에 매우 중요하고 패션업체 견습생 등은 영국 패션의 미래”라며 “내가 이끄는 정부에서 (패션산업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고 말했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 패션의 수출이 급감하고 전 세계에서 런던 패션학교로 몰려드는 디자이너 지망생이 줄어 패션 허브로서의 기능을 더 이상 못할 것이라는 업계의 걱정에 대한 나름의 명확한 답변이다.

 하지만 이런 공식적인 발언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는 역시 그가 입은 옷이었다. 평소 옷 좋아하고 잘 입기로 유명한 메이 총리는 이날 세계 3대 패션학교로 꼽히는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한 두 젊은 디자이너 레비 파머와 매슈 하딩이 2012년 론칭한 신진 브랜드 파머하딩의 오버사이즈 화이트 셔츠를 입었다. 총리 취임식 당일 입었던 영국 유명 디자이너 어맨다 웨이클리의 바지와 러셀&브롬리 구두를 받쳐 입고 말이다. 메이 총리가 입은 파머하딩의 120파운드(약 17만원)짜리 셔츠는 당연히 바로 매진됐고,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평소 영국 패션의 열렬한 지지자답게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은 물론 메이 정부가 패션산업에 얼마나 큰 관심이 있는지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한 셈이다.

 이처럼 정치인의 옷은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런데도 한국에선 이를 활용할 생각보다 여성 정치인에게 튀지 않는 무색무취 패션만 요구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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