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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아빠 입맛 되찾아준 가정식 요리

중앙선데이 2016.09.25 00:30 498호 28면 지면보기
직장인 관련 기사는 보통 밝고 즐거운 내용보다 답답하고 힘든 내용인 경우가 많다. 특히 상사 때문에 겪는 직장인의 애환을 다룬 기사는 제목만 봐도 숨이 턱 막힌다. ‘상사 기분에 사무실 분위기 오르락내리락 서러워’‘윗사람 지시대로 굴러가는 부속품…나는 사람이 아니무니다’ 등등.



나 역시 다양한 유형의 직장 상사를 겪었지만 그중 기러기 아빠를 상사로 모셨을 때가 유달리 힘들었다. 특히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때면 그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한 눈치 경쟁이 치열했다. 타이밍을 잘못 맞추면 꼼짝없이 저녁 겸 술자리에 끌려가 원치 않는 야근을 해야 한다. 가끔은 안쓰러워 챙겨드리고도 싶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서야 어찌 감당하나.


이지민의 "오늘 한 잔 어때요?" -12- 수퍼판

가장 당혹스러웠던 순간은 “주말에 일이 있으니 출근하라”고 지시를 받았을 때다. ‘무슨 급한 일이기에 그러나’ 싶어 늦잠도 포기하고 토요일 오전 출근을 했더니, 씩 웃으며 한마디 한다. “밥 먹으러 갑시다.” ‘아아, 저에게 정말 왜 이러세요’ 속으로 울며 따라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직 후에 가끔 전화로 안부를 여쭈곤 했는데, 그때마다 돌아오는 답은 똑같다. “가족들은 아직도 해외에 있어. 내년쯤 돌아올 것 같아.” 이번 추석을 앞두고도 전화를 걸었더니 그분은 여전히 한숨부터 쉬었다. “집밥이 그리울 텐데 혼자 생활하기 힘들지 않으세요?”“요즘 도통 입맛이 없어서 대충 먹고 치우는 중이야. 혹시 가정식 요리 잘하는 데 알면 소개시켜줘.” 아아, 정말 저한테 왜 이러세요. 별 수 없이 난 그날 그분과 함께 이촌동으로 향했다.



옛 상사를 모시고 간 곳은 동부이촌동에 위치한 ‘수퍼판(super PAN)’. ‘이촌동 가정요리 선생님’으로 유명한 요리연구가 우정욱씨가 운영하는 가정식 요리 전문점이다. 수퍼판이라는 상호명은 ‘음식과 함께 즐거운 판을 벌이자’는 뜻. 쉬운 재료와 간단한 조리법을 활용한 정갈하고 따뜻한 요리가 한식부터 퓨전까지 다양하게 준비돼 있다.



모든 음식의 공통점은 제철 식재료를 이용해 정성껏 만든 엄마표 가정식이라는 것. 가족과 떨어져 외롭게 고군분투하는 기러기 아빠에게 이곳만 한 데가 또 있을까.



수퍼판의 인기 메뉴는 부드럽게 졸여낸 검은 콩에 달콤한 마스카포네 치즈를 버무려 바게트 빵에 발라먹는 ‘서리태 마스카포네 스프레드’, 국내산 육우를 정성스럽게 치대서 만든 소고기 패티에 데미그라스 소스를 끼얹고 반숙 계란 프라이를 올린 ‘함박 스테이크’다. 메뉴의 특성상 여성들이 더 선호한다.



기러기 아빠를 위한 음식으로는 아내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한식이 좋을 것 같아 특별 코스를 추천받았다. 메뉴판을 보고 한참을 상의한 끝에 ‘몸보신’ 코스로 전복초-전복 갈비찜-백명란찌개를 순서대로 주문했다. 주당들의 입맛에 맞출 수 있도록 각각의 음식에 어울리는 술도 골랐다.



첫 메뉴인 전복초에는 싱싱한 전복 3~4마리가 들어간다. 와인에 살짝 데친 전복을 간장·매실로 만든 양념장에 조려 밑반찬처럼 먹기 좋게 만든 메뉴다. 은근한 단맛 때문에 속을 간단히 채우기에 좋다. 짭쪼름한 전복초와 매칭한 술은 남성들이 좋아하는 ‘사무엘 아담스 보스턴 라거’. 풍부한 보리향이 느껴지는데 홉의 맛이 강하고 드라이한 피니시가 특징이라 음식에 곁들이기에 좋다.



다음 메뉴는 전복 갈비찜. 명절날 가족 모임이 없으면 웬만해선 먹기 힘든 메뉴다. 수퍼판의 갈비찜은 갈비와 전복·대추·무가 들어간 정갈한 서울식 갈비찜이다. 물엿이나 MSG 같은 화학조미료가 일체 들어가지 않고 배즙·양파즙으로만 단맛을 냈다. 국물이 자작한데 남은 국물에 밥 비며 먹으면 이 또한 별미다. 밥은 유기농 흑보리가 들어가 고슬고슬 씹는 맛이 있는데 갈비찜 소스를 만나면 더욱 감칠맛이 난다.



전복 갈비찜엔 경상남도 함양의 명주 ‘솔송주’를 매칭했다. 사대부가에서 500년 넘게 전해 내려온 가양주로 함양지역에서는 흑돼지 구이, 안의 갈비찜에 솔송주를 곁들인다. 갈비찜의 양념과 부드럽게 어우러지면서 은은한 솔향이 입안에 퍼진다.



마지막 메뉴는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해줄 백명란 새우젓찌개. 멸치국물을 베이스로 좋은 새우젓으로 간을 했다. 속초에서 공수해오는 백명란은 맑고 깔끔한 맛을 낸다. 청양고추가 들어가 국물이 은근히 매콤하고 개운하다. 이런 찌개에는 뭐니 뭐니 해도 깔끔한 증류주가 딱이라서 ‘화요 25도’를 곁들였다.



그는 음식과 함께 술을 남김없이 먹었다. “오랜만에 정말 식사다운 식사를 한 것 같아. 고마워.”“에고, 내년에 가족들이 돌아오면 힘들지 않으실 거예요. 조금만 더 힘내세요.”



두둑한 배로 함께 가게를 나서는데 요리사 우정욱 선생이 뛰어와 “기러기 아빠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식사 잊지 말고 챙기세요”라며 직접 만든 고추장을 손에 꼭 쥐여 주었다. 중년 남자의 손에 어색하게 들린 고추장, 그걸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분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역시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 매운 고추처럼 힘내세요! ●



 



 



이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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