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의, 아니 세계 관객의 영원한 여우(女優)인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한 ‘다가오는 것들’이야말로 그런 작품이다. 영화는 인생의 기나긴 고뇌를 겪게 하되 그 고통을 줄여 주려는 듯 숏컷(shortcut)의 한가운데로 인도한다. 덕분에 관객들은 102분 만에 인생의 진리를 터득하게 된다. 이 영화는 그래서 일종의 살아있는 인생철학서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
또 다른 책장에 꽂혀 있는 유나버머(본명 시어도어 존 카진스키·기술의 진보가 인류의 적이라며 사회 지도층에게 편지폭탄을 보낸 테러리스트. 하버드대에서 수학을 전공했다)의 저서를 보고서는 아주 걱정스러워 하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이혼한 남편이 자기 것이라며 그녀가 밑줄까지 일일이 그어 가며 탐독한 레비나스(엠마누엘 레비나스·존재론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의 책을 가져 가자 “뻔뻔한 인간”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그가 꼭 필요한 책이라고 하자 쇼펜하이머의 저서를 따로 챙겨서 준다. 관객들은 고속도로 위의 히치하이커 마냥, 난해하지만 그래서 오랜만에 구미가 당기는 철학서로의 여행에 슬쩍 동승하는 느낌을 얻게 된다.
그렇다고 영화를 철학적 담론으로만 가득 채운 채 잘난 척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는 일상의 언어와 생활의 습성들로 가득 차 있으며, 마흔을 훌쩍 넘겨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는 한 여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노출한다. 나탈리에게 ‘다가 오는 삶’은 절대 녹록하지가 않은데, 그건 우리가 모두 경험하거나 경험하게 될 일과도 같다. 우리 역시 나탈리처럼 급진주의(마르크스주의)에서 중도 현실주의자로 변신했다. 나탈리처럼 미워하면서도 사랑했던 아버지 혹은 어머니를 상실(喪失)한 경험이 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배우자와 헤어지기도 했는데 현실에서는 꼭 그렇지 않다 해도 정서적으로는 졸혼(卒婚)을 한 지 오래됐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다 커서 자신의 아이를 낳고 독립했으며, 키우던 고양이마저 다른 곳으로 떠나 보낼 때가 됐다. 자신이 고집했던 교육방식, 철학서의 형식과 내용, 삶의 방식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된 것이다.

“원한다면 우리는 행복 없이 지낼 수 있다.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일 행복이 오지 않으면 희망은 지속되며 환영의 매력은 그것을 준 열정만큼 지속된다. 이 상태는 자체로서 충족되며 그 근심에서 나온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덜 기쁜 법이다.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이다.”
파스칼의 『팡세』의 일부인 듯 보이는 이 문장을, 나탈리는 오랜 마음속 갈등을 겪고 나서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인용해 들려준다. 인생은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한 것이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참으로 오래 걸리는 셈인데, 그걸 알게 되지 못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진리는 늘 제 발로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셀라비. 댓츠 저스트 라이프. 그게 바로 인생인 것이다.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말할 나위가 없다. 그건 이 배우가 뛰어나서이기도 하지만 인생을 성찰할 나이가 충분히 지났기 때문이다. 위페르 만큼 놀라운 인물은 미아-한센 로브 감독인데 1981년생으로 30대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삶의 진실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인생은 때론 경험에 앞서 관념과 이론으로 터득되는 법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
글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anmail.net, 사진 찬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