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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한 것이다

중앙선데이 2016.09.25 00:24 498호 30면 지면보기
알고 보면 영화는 사색(思索)의 산물이다. 하나의 사물, 한 가지 혹은 여러 가지의 사건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인간의 관계와 세상의 움직임에 대해 관객은 감독의 사색을 경유해 스스로의 사색을 경험하게 된다. 영화는 삶이란 무엇인지를 통찰케 하는 짧고 강렬한 통로와 같은 무엇이다.



프랑스의, 아니 세계 관객의 영원한 여우(女優)인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한 ‘다가오는 것들’이야말로 그런 작품이다. 영화는 인생의 기나긴 고뇌를 겪게 하되 그 고통을 줄여 주려는 듯 숏컷(shortcut)의 한가운데로 인도한다. 덕분에 관객들은 102분 만에 인생의 진리를 터득하게 된다. 이 영화는 그래서 일종의 살아있는 인생철학서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

영화 속에는 온갖, 주옥같은 철학서의 문구와 철학자들의 이름이 하늘의 별처럼 떠다닌다. 특히 위페르가 맡은 주인공 나탈리가 6·8 혁명세대로서 한동안 급진 좌파였던 탓 때문인지 아도르노 등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분위기를 기본으로 깔고 간다. 거기에 미셸 푸코에 대한 언급이 오가는가 하면, 그녀가 아끼는 애제자 파비앙(로망 콜랭카)이 조직한 대안공동체의 숙소에서 레이몽 아롱의 저서(아마도 『지식의 아편』이 아닐까 싶은데)를 보고서는 나탈리가 “레이몽 아롱이라니…”하며 살짝 비웃는 장면도 나온다.



또 다른 책장에 꽂혀 있는 유나버머(본명 시어도어 존 카진스키·기술의 진보가 인류의 적이라며 사회 지도층에게 편지폭탄을 보낸 테러리스트. 하버드대에서 수학을 전공했다)의 저서를 보고서는 아주 걱정스러워 하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이혼한 남편이 자기 것이라며 그녀가 밑줄까지 일일이 그어 가며 탐독한 레비나스(엠마누엘 레비나스·존재론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의 책을 가져 가자 “뻔뻔한 인간”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그가 꼭 필요한 책이라고 하자 쇼펜하이머의 저서를 따로 챙겨서 준다. 관객들은 고속도로 위의 히치하이커 마냥, 난해하지만 그래서 오랜만에 구미가 당기는 철학서로의 여행에 슬쩍 동승하는 느낌을 얻게 된다.



그렇다고 영화를 철학적 담론으로만 가득 채운 채 잘난 척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는 일상의 언어와 생활의 습성들로 가득 차 있으며, 마흔을 훌쩍 넘겨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는 한 여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노출한다. 나탈리에게 ‘다가 오는 삶’은 절대 녹록하지가 않은데, 그건 우리가 모두 경험하거나 경험하게 될 일과도 같다. 우리 역시 나탈리처럼 급진주의(마르크스주의)에서 중도 현실주의자로 변신했다. 나탈리처럼 미워하면서도 사랑했던 아버지 혹은 어머니를 상실(喪失)한 경험이 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배우자와 헤어지기도 했는데 현실에서는 꼭 그렇지 않다 해도 정서적으로는 졸혼(卒婚)을 한 지 오래됐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다 커서 자신의 아이를 낳고 독립했으며, 키우던 고양이마저 다른 곳으로 떠나 보낼 때가 됐다. 자신이 고집했던 교육방식, 철학서의 형식과 내용, 삶의 방식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된 것이다.



나탈리가 근무하는 고등학교의 출판사에서는 이제 빡빡한 글로 채워져 있는 철학 총서는 더 이상 출간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 때문에 발끈 화를 냈던 나탈리는 딸 아이의 갓난 아이에게 선물로 철학 그림책을 선물한다. 그 책은 그녀가 이론과 실천이 일치하지 않는 인물이라며, 세상을 바꾸는데 서명운동 정도로 만족하는 수정주의자이자 부르주아로 변절했다고 비판하는 제자 파비앙이 만든 것이다. 파비앙 역시 삶의 현실에 자신의 이상을 맞춰 나갈 수밖에 없는 셈이다.



“원한다면 우리는 행복 없이 지낼 수 있다.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일 행복이 오지 않으면 희망은 지속되며 환영의 매력은 그것을 준 열정만큼 지속된다. 이 상태는 자체로서 충족되며 그 근심에서 나온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덜 기쁜 법이다.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이다.”



파스칼의 『팡세』의 일부인 듯 보이는 이 문장을, 나탈리는 오랜 마음속 갈등을 겪고 나서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인용해 들려준다. 인생은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한 것이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참으로 오래 걸리는 셈인데, 그걸 알게 되지 못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진리는 늘 제 발로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셀라비. 댓츠 저스트 라이프. 그게 바로 인생인 것이다.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말할 나위가 없다. 그건 이 배우가 뛰어나서이기도 하지만 인생을 성찰할 나이가 충분히 지났기 때문이다. 위페르 만큼 놀라운 인물은 미아-한센 로브 감독인데 1981년생으로 30대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삶의 진실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인생은 때론 경험에 앞서 관념과 이론으로 터득되는 법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



 



 



글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anmail.net, 사진 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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