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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오디세이 2016 참가자 릴레이 기고 <4> 수천 년 아팠던 연해주, 신문명의 땅으로

중앙일보 2016.09.22 00:46 종합 33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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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제
서강대학교 교수·경제학

연해주 평야는 넓었다. 사방으로 고개를 돌려봐도 지평선과 지평선으로 이어지는 평야에 파랗고 노란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문득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구가 떠올랐다. 공해 없는 새파란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땅에서 하늘거리며 피어 있는 야생화-누가 가꾸지 않아도, 누가 쳐다봐 주지 않아도, 하늘색 태양빛과 어울려 너무나 아름답게 피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 드넓은 땅은 과거 수만 년 우리와 같은 핏줄을 나눈 퉁구스족이 살았던 땅이다.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의 땅이었고 금나라로 이어지며 여진족들이 지배했던 땅이다. 1860년 청나라 말기 베이징조약에 의해 이 땅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어디에도 이제 퉁구스족의 얼굴, 생활 양식, 건축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불과 150년 만에 이 땅은 백안의 유럽인들이 사는 땅, 완전한 유럽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그곳에 우리와 같은 핏줄, 태양에 그을리고 황토의 기운에 젖은 얼굴을 가진 동아시아 민족의 흔적은 사라져 버렸다. 두만강을 건너면 바로 만나는 이 땅이 조약 하나로 그렇게 변해 버린 것이다. 어렸을 적 독립군 영화를 본 후 늘 가슴 설레게 들었던 흑룡강이란 이름, 몽골인들이 평화롭게 흐른다고 붙인 이름 아무르강이 유유히 흘러가는 이 땅이 어찌 지구의 약 반 바퀴를 돌아가야 만날 수 있는 백안의 유럽인들이 지배하며 사는 땅으로 바뀌어 버렸는가.

직선 거리로 두 시간도 걸리지 않을 블라디보스토크를 북한의 영공을 피해 오느라 서해 쪽으로, 다시 만주를 횡단해 세 시간을 날아왔다. 비행 궤도를 보며 편치 않았던 마음은 공항 입국장에서 금발의 러시아 이민국 직원을 마주하며 낯설어졌고, 다시 시내에 도착해 이 도시가 완전히 유럽인들의 도시가 되어 있음을 보고 아쉬움과 탄식으로 변했다. 중동에 가면 중동인이 살고, 유럽에 가면 유럽인이 살며, 아프리카에 가면 아프리카인이 살고 있다. 그러나 왜 이 땅, 극동아시아의 땅은 유럽인들의 도시로 변했는가? 일개 조약이라는 것이, 국력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로구나. 지도자가 국가 경영을 잘못하고 국민이 깨어 있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오게 되는지를 알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여기 이 땅, 연해주에 와서 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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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인접한 러시아 국경도시 하산 인근의 들녘. 지천으로 핀 노란 야생화 뒤로 펼쳐진 산세가 우리나라 지형과 비슷해 조국 산하를 바라보는 느낌이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오디세이 일행은 오래 서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격살하기 위해 권총을 품고 하얼빈역으로 가기 위해 이 플랫폼에 서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17만 명의 한인이 생면부지의 땅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할 때 이 역에서 열차에 올랐던 것이다. 나는 그 플랫폼에서 잠시 상념에 잠겼다. 안중근 의사는 그가 스스로 택한 운명을 피하고 싶지 않았을까? 나라면 아무 주저 없이 하얼빈행 열차에 몸을 실었을까? 나라와 삶과 운명, 그리고 시대가 내미는 의무라는 말들이 잠시 어지럽게 교차했다.

극동연합대학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러시아 극동개발부 장관 전 고문이 하는 말은 애정 섞인 말로 들리긴 했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를 부끄럽게 했다. “당신들은 왜 스스로 남북 관계를 개선하고 풀어 나가려 하지 않고 남들한테 와서 그걸 해달라고 하느냐?” 그는 다른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며 사진 하나만 보여주고 그의 발표를 끝내려 했다. 리우 올림픽에서 기계체조 이은주 선수가 북한 선수 홍은정과 함께 밝게 웃으며 찍은 셀카 사진이었다. 그 사진은 그의 항변처럼 ‘너희 양쪽 정부는 무엇 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었다.

연해주는 지난 수천 년 주인을 바꾸어 온 아픈 땅이다. 이제 그 땅에 한국·북한·중국·러시아·일본이 미래 동북아 평화와 공동 번영을 이루어 가는 씨앗을 함께 심어보자. 북극항로가 일대일로와 연결되고 동양과 서양이 만나며 신문명이 형성되는 땅으로 이곳을 바꾸어 보자. 그것이 아마 이 땅이 가진 지금의 시대적 운명이고 우리가 해내야 할 시대적 과제가 아닐까. ‘이 세상 그 어떤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도종환의 시구처럼 이번 평화 오디세이 여정은 우리에게 이 땅이 걸어가야 할 미래에 대해 그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조 윤 제
서강대학교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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