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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옥이 지진 아킬레스건…1만2000채 중 2031채 피해

중앙일보 2016.09.19 01:49 종합 4면 지면보기
지난 12일 발생한 규모 5.8의 지진 당시 진앙이었던 경북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 18일 오전 마을 입구 쪽 주택에서 만난 80대 주민 진모(여)씨는 “추석을 거꾸로 쇘다”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기와 떨어져 나가거나 벽체 균열
지붕에 기와·목재·흙 얹어 하중 커
지진으로 밑이 흔들리며 큰 피해

진씨는 “화장실 쪽 벽을 타고 빗물이 들어온다”며 걸레로 마룻바닥을 분주히 닦았다. 그는 “지진으로 집 천장이 2㎝ 정도 내려앉아 혹시 집이 무너질까 봐 추석 연휴 내내 옷을 입고 마루에서 잠을 청했다”며 “계속되는 여진 때문에 추석 때 인사하러 온 자식들도 서둘러 돌려보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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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경주시 황남동 한옥지구에서 만난 주민 정해윤(67·여)씨는 오른쪽 발목에 파스를 붙이고 파란색 천막으로 뒤덮인 지붕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씨는 “지진 당시 기왓장이 깨진 데다 17일 비가 내려 다락방으로 물이 샜다”며 “폭우가 내린 날 지붕을 살피다 미끄러져 다리까지 다쳤다”며 답답해했다.

강진 이후 300여 회가 넘는 여진에다 폭우까지 쏟아져 경주를 비롯한 대구·경북 일대는 추석 연휴 분위기가 사실상 실종된 듯했다. 경주시는 지진 직후인 지난 15일 정부에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건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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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앙지인 내남면 주민들이 지난 17일 경북 적십자와 대구한의대 상담심리학과 지원으로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경주=프리랜서 공정식], [뉴시스]

박종헌(61) 부지2리 이장은 “추석 연휴에 적십자사의 도움으로 주민들이 단체로 심리치료를 받고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며 “하지만 여진이 수백 차례 계속돼 또다시 큰 지진이 일어날까 걱정돼 마을 주민들이 추석도 제대로 못 쇠고 지금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진 발생 6일이 지났지만 한옥이 모여 있는 경주시 황남동 한옥지구와 포석정 인근 배동은 지진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부서진 기왓장이 골목에 떨어져 있고 황남동 주민자치센터 앞엔 기왓장에 깔려 부서진 차량이 그대로 세워져 있다. 일부 한옥 지붕은 파손 흔적이 보였지만 비를 막을 파란 천막조차 씌워져 있지 않다.

황남동의 한 전통시장에서 만난 50대 주민은 “바닥에 떨어진 기왓장, 부서진 차량을 보면서 추석을 즐겁게 보낼 기분이 나지 않았다. 계속되는 여진에다 폭우까지 몰아닥쳐 불안한 마음에 추석날 아침밥을 경주시내 친척집에 가서 먹었다”고 말했다. 일부 주민은 140㎜ 이상 폭우가 내린 지난 16일 오전부터 17일 오후까지 집안 곳곳에 물이 새어 양동이를 가져다가 물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황남동 한옥에 사는 강문주(46·여)씨는 매년 추석 때 과일만 6~7가지, 전을 7가지 이상 부쳐 차례를 지낸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는 기존 차례 음식의 딱 절반만 차렸다고 했다. 그것도 일부 음식은 부랴부랴 친척집에 가서 얻어다 차례상에 올렸다.

지난 12일 지진으로 기왓장이 부서지는 피해를 봤고 여진에다 비까지 내리면서 추석 차례상을 준비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강씨는 “추석 연휴에 시장 대신 동네 철물점에서 비닐을 사 와서 누수 피해를 막는 데 애를 썼다. 지진 때문에 차례상 차리기에 소홀해 조상님께 죄송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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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보수업체 직원들이 18일 경북 경주시 사정동 한옥마을에서 지진으로 파손된 지붕을 방수천막으로 덮고 있다. [경주=프리랜서 공정식], [뉴시스]

사정동 한옥지구에 사는 이모(71) 할머니는 올해 추석을 예년과 달리 흥겹게 보내지 못했다. 외지에 나가 사는 아들이 모처럼 집에 왔지만 한옥 일부가 파손돼 천막을 사다가 지붕을 덮는다고 구슬땀을 흘리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떠났기 때문이다.

경주 도심 주민들도 추석을 거꾸로 보내긴 마찬가지였다. 40대 주부는 “자식들을 경주로 부르지 않고 대구·부산으로 추석을 쇠러 떠나는 어르신이 적지 않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경북도의 집계에 따르면 18일까지 경주에서만 이번 지진으로 기왓장이 떨어져 나갔다고 신고한 한옥이 2031채였다. 특히 황남동의 경우 한옥 3300여 동 중 670여 동에서 기와가 떨어져 나가거나 벽체 균열 등의 피해를 봤다. 이번 지진 와중에 경주에서 유달리 한옥 피해가 많았던 이유는 그동안 경주시가 신라 천년 고도(古都)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정책적으로 한옥 건축을 적극 장려해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주에서 기와지붕을 얹은 한옥은 1만2000채가 넘는다.

경주시의 한옥 장려정책이 뜻하지 않게 지진 피해의 급소(아킬레스건)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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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피해 현장을 둘러본 단국대 박종근(건설방재안전공학과) 교수는 “구조적으로 한옥은 지붕에 기와·목재·흙 등을 얹어 하중이 많이 나간다. 그런 상태에서 아랫부분에 조금이라도 흔들림이 발생하면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북도와 경주시는 지진 피해를 본 한옥 기와지붕 교체비용의 70%를 지원해 달라고 정부에 건의했다.

대구·경주=송의호·김윤호 기자 yee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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