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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 연필회사 망한다고?…300만원 세트도 매진

중앙일보 2016.09.19 00:52 종합 20면 지면보기
“이 연필은 이상적이라고 할 만큼 단단하면서도 매우 부드러워. 목공용 연필보다 색감도 훨씬 좋지. 언젠가 재봉사 소녀를 그릴 때 이 연필을 썼는데 석판화 같은 느낌이 정말 만족스러웠어. 게다가 한 자루에 20센트밖에 안 해….”(빈센트 반 고흐)

디지털시대 문구사 고급화 전략
명품 수첩 몰스킨, 디지털펜 출시
글씨 쓰면 스마트폰 실시간 전송
미쓰비시연필, 나노섬유펜 내놔

“지금껏 써본 것 중에 최고야. 물론 값이 세 배는 더 비싸지만 부드럽고 잘 부러지지 않아. 이름은 블랙윙인데 정말 종이 위에서 활강하며 미끄러진다니까.”(존 스타인벡)

변화의 시절이 닥쳤다. 오랜 시간 빈센트 반 고흐나 『에덴의 동쪽』을 쓴 존 스타인벡 등 명사들로부터 사랑 고백을 받아온 연필과 같은 문구류의 이야기다. 생각을 기록하는 도구로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했지만 ‘디지털(digital)’ 파고는 새로운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문방사우(文房四友)로 불리는 펜·종이 같은 기록하는 도구들의 자리는 스마트폰이 꿰찼다.

사람들은 문구 회사들의 후퇴를 예견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시카고트리뷴은 “펜을 포함한 필기류 시장이 2014년 162억 달러(약 18조원) 규모에서 2019년엔 202억 달러(약 22조5000억원)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예상 밖 결과를 불러온 것은 시장을 주도하는 오랜 명품 문구 회사들이었다. 이들은 취미, 소장용품으로 영역 변화를 꾀했다. 필기 시장이 커진 건 ‘컬러링북’ 열풍이 한몫했다. 아이들이나 하는 것으로 치부되던 색칠놀이가 어른들을 위로하는 놀이로 바뀌면서 색연필 판매량이 늘었다. 여기에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가들의 전통적인 ‘필기구 수요’가 시장을 넓히는 데 일조했다. 미국 시장조사기관인 테크나비오는 “아시아와 남미·중동 지역의 인구 증가로 필기류 수요가 늘고 미국과 유럽에선 필기용품이 고가 시계처럼 패션 액세서리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럭셔리 펜들이 선물용으로 각광받고 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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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 연필로 흥행 몰이를 하는 선두주자는 파버카스텔이다. 1761년 독일에서 설립된 255년 된 이 회사는 세계 최장수 기업 중 하나다. 캐비닛을 만들어 팔던 카스파르 파버가 연필을 만들어 뉘른베르크에서 팔면서 연필회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반 고흐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상적인 연필’이라고 극찬했던 연필도 파버카스텔 제품이었다. 세계 최초로 육각형 연필을 만든 이 회사는 일찌감치 프리미엄 제품을 내놨다. 2001년 창립 240주년을 기념해 백금과 다이아몬드로 치장해 만든 ‘퍼펙트 펜슬’이 시초나 마찬가지였다. 99개 한정으로 만든 이 제품은 1만 유로에 달했지만 동났다. 올 들어선 독일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인 카를 라거펠트와 손잡고 ‘칼 박스’를 선보였다. 수채 색연필과 유성 색연필, 크레용까지 총 350여 개를 담아 우리 돈 300만원이 넘는 2850달러에 내놨는데 이 역시 매진 행렬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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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버카스텔의 오랜 맞수인 스테들러도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1834년 당시 연필 장인으로 불리던 프레드리히 스테들러가 세계 최초 색연필을 만들고 이듬해 뉘른베르크에 공장을 세운 것이 이 회사의 뿌리가 됐다. 1866년엔 공장 직원이 54명에 달해 한 해 연필 생산량이 216만 개에 달했다. 이 회사는 1920년대엔 미국으로 발을 넓혔고 49년엔 볼펜, 50년에 이르러 우리가 ‘샤프’로 알고 있는 기계식 연필 제조에 들어갔다. 문구류 생산의 85% 가까이를 지금까지도 독일에서 하고 있는 이 회사는 흑연으로 만드는 연필 대신 디지털로 눈을 돌렸다. 2011년부터 선보이고 있는 스테들러 디지털 펜 990 시리즈로 아마존에서 280달러대에 구입이 가능하다. 일반 볼펜이나 마찬가지인 이 제품은 종이에 별도의 수신기를 끼운 뒤 글씨를 쓰면 작성한 문서를 파일로 전환해 컴퓨터에서 받아볼 수 있다. 30여 개에 달하는 언어가 지원되며 A4 용지로 100장까지 저장할 수 있다. 최근엔 어린이 교육용 모바일 애플리케이션도 내놨다. 스케치북 대신 정보기술(IT) 기기로 화면을 옮겨왔지만 나무펜으로 펜대를 만들어 연필 느낌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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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강국으로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일본도 필기구 시장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KOTRA에 따르면 일본 샤프 시장은 2011년 144억 엔에서 지난해 184억 엔 규모로 커져 연평균 6.3% 성장했다. 수성 볼펜 시장 역시 2011년 339억 엔 규모에서 지난해엔 523억 엔으로 커졌다. KOTRA는 “IT 기기처럼 완전히 새로운 제품이 출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씩 기능을 개선해 진화한 제품이 꾸준히 출시되면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최초로 연필 생산을 시작한 미쓰비시연필은 손에 얼마나 힘을 주느냐에 따라 굵기가 달라지는 만년필 같은 볼펜을 지난해 말 선보였다. 차세대 소재로 꼽히는 셀룰로스 나노섬유를 써 빠르고 매끄럽게 쓸 수 있는 젤 잉크 볼펜도 지난 5월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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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프심이 잘 부러지지 않도록 설계된 제브라 ‘델가드’.

제브라 역시 2014년 샤프심이 잘 부러지지 않도록 설계한 ‘델가드’ 시리즈를 보완했다. 스누피 캐릭터를 입히고 샤프심 굵기를 0.3㎜까지 다양화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제브라는 “지난해 개당 1000엔 이상 하는 상품 매출이 10년 전에 비해 약 세 배로 늘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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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 시장의 강자로 떠오른 몰스킨 역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우리에게 헤밍웨이의 수첩으로 알려진 몰스킨은 1997년 이탈리아에서 세워졌다. 영국 작가 브루스 채트윈은 86년 호주 여행 직전 단골 문방구에 들러 평소 애용하던 ‘기름 먹인 검은 천 제본 노트(moleskine)’를 찾았지만 제조자가 사망해 더 이상 구입할 수 없었다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 몰스킨은 채트윈이 언급한 노트를 부활시켜 고급 수첩 시장에서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몰스킨은 지난 4월엔 스마트 필기 세트(199달러)를 선보였다. 몰스킨 수첩을 기본으로 몰스킨 펜 플러스로 불리는 디지털 펜을 더했다. 노트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 실시간으로 블루투스로 연결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로 내용을 전송해준다. 몰스킨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1년이 아닌 18개월 단위의 수첩을 내놓았고, 지난 7월엔 스위스 제네바 공항에 ‘몰스킨 카페’를 열었다. 몰스킨은 “종이 감촉을 직접 느껴보고 아날로그 콘텐트를 디지털로 전환해주는 스마트 노트북, 몰스킨 가방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밝혔다. 『문구의 모험』 저자인 제임스 워드는 “전구가 발명됐지만 양초는 사라지지 않았다. 양초는 예술의 영역으로 이동해 ‘낭만적인 물건’으로 용도가 달라졌다”고 변화를 설명했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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