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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오디세이 2016 참가자 릴레이 기고 <3> 북방 프레임을 새로 짜자

중앙일보 2016.09.19 00:31 종합 29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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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민
전 문화관광부 장관
한국콘텐츠공제조합 이사장

시베리아는 영구 동토, 그리고 불모지라는 오랜 선입견은 평화 오디세이 2016 여정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하늘에서 본 시베리아의 숲은 열대우림(熱帶雨林) 못지않은 한대설림(寒帶雪林)의 정글이다. 블라디보스토크나 하바롭스크를 농토를 찾아나선 유민들의 땅이거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지 정도로 알았던 것은 단견이었다. 발해는 물론 우리 민족이 19세기 북방 개척에 나서고 동아시아 영구 평화를 도모한 과거를 잘 몰랐던 무지의 소산이었다. 막연히 아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음을 절감했다.

지구온난화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북극해로 연결하는 북극항로가 열렸다. 연 100일 이상 쇄빙선 없이 상업 항해가 가능해졌다. 남방항로에 비해 3분의 1 이상 시간과 비용이 절약된다. 기존 매장량의 3분의 1이 넘는 석유·석탄·가스 자원이 북극권에서 새롭게 발견되고 경제적 채굴이 가능해졌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의 공격적 개발에 나섰다. 극동개발부 신설, 2012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개최, 극동개발 2025 프로그램 등 신동방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에너지자원 수출과 나진~하산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연결, 나진항 및 경제특구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동북아 국가들과 협력을 꾀하며 적극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러시아는 1991년 소련 해체 이후에도 서방과의 관계가 소원하다. 국경을 맞댄 인구대국 중국이나 영토 분쟁을 겪는 경제강국 일본과는 관계가 불편하다. 자원영토 대국이자 기초과학 강국 러시아와 궁합이 맞는 동북아 파트너로는 우리가 제격이다. 구조적 갈등이 없고 최고의 산업생산시스템, 농수축산 능력, 토목건축플랜트 기술, 풍부한 신도시 건설 경험, 의료과학 등 러시아에 필요한 스펙을 고루 갖추고 있다. 러시아가 먼저 가스 파이프라인의 한반도 관통이나 나진·하산 프로젝트를 제안한 까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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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평원은 팜파스 못지않게 광활하고 비옥한 초원이다. 자원이 풍부하고 북극항로가 열려 투자 가치가 커졌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남쪽 자원 수입, 남쪽 공단에서 가공, 남쪽 항로로 수출해온 우리의 남방경제는 한계를 맞고 있다. 북극항로, 북쪽 자원과 시베리아 개발 등 북방경제가 돌파구로 등장했다. 정부는 2013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실크로드익스프레스(SRX) 추진과 북방 에너지 네트워크 구축을 선언했다. 그러나 올 3월 유엔이 북한 핵·미사일로 인한 경제제재에 나서자 정부는 개성공단 폐쇄에 이어 러시아와 함께 추진했던 나진·하산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지난 7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배치 결정에 북한은 8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9월 핵무기화 실험에 성공했다. 반면 우리는 날씨가 나쁘면 못 온다는 미국의 핵억제 전력을 쳐다만 보는 무기력과 평양 지우기라는 무책임한 말들의 황망한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81년 서울 올림픽이 유치되자 북한은 83년 아웅산 암살 테러와 87년 민항기 공중 폭파 테러 등 방해공작을 극력 전개했다. 올림픽은 80년 모스크바 대회와 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를 동서가 서로 보이콧하면서 반쪽이 났다. 86년 4월 그라모프 소련 체육장관 일행은 국가올림픽위원회연합회 서울총회에 참석해 정세 판단에 나섰다. 새벽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의 넘치는 청과물과 대낮 남대문시장의 산처럼 쌓인 생필품에 그들은 놀랐다. 88년 서울 올림픽에 소련은 앞장서 참가했다. 90년 소련, 92년 중국에 이어 세계의 공산국들이 우리와 수교했다. 소련이 디딤돌 된 80년대 북방정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사는 나선형으로 진화한다. 유가 폭락의 어려움 속에서 신동방 정책의 협력처를 찾는 러시아를 다시 주목하게 된다. 북방경제와 북한의 핵 모험주의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신북방 정책이 필요한 우리에게 필수적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한·러 간 평화적 공동선의 추구를 통해 경제적 실리는 물론 북한을 묶는 실효적 그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진·하산 프로젝트의 재개, 제2 개성공단의 연해주 건립, 가스 파이프라인과 시베리아 철도의 한반도 연결 및 고속화 참여는 빠를수록 좋다.

러시아의 기초과학과 우주공학이 우리의 응용과학기술과 결합하는 시너지는 크다. 북극항로 개통으로 시베리아 자원과 메탄하이드레이트의 채굴에서 매머드의 복원까지 많은 분야에서 성과를 낼 수 있다. 바이칼에서 연해주까지 노마드 벨트의 우리 민족사 연구를 위한 협력도 긴요하다. 베링해 크루즈, 호랑이 사파리, 원시 자연탐사 같은 동시베리아 체험은 적극 개척해야 할 관광자원이고 북방 알기의 첩경이다. 의료 등 한류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연방대학이나 마린스키 극장과의 교류는 상호 소통의 윤활유가 된다.

김 종 민
전 문화관광부 장관
한국콘텐츠공제조합 이사장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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