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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제8요일의 남자] #13. 기억의 영속

중앙일보 2016.09.19 00:01
입국장 여객터미널은 귀국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카페로 들어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 쥬디가 말하는 것으로 봐서 30분 정도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에프의 오피스텔 앞에서 오비서관을 본 이후 처음으로 고요한 시간이었다. 캐리어 때문에 오비서관을 따라 이곳까지 왔지만 정확히 내가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비서관도, 동행했던 남자도, 캐리어도, 희정의 메모와 전화까지, 모든 게 수수께끼 같았다. 이들과 에프가 연관 돼 있다는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모두 짐작일 뿐 아무 것도 정확한 건 없었다.
 
에프의 캐리어가 결국 누구의 손으로 흘러가는 지 궁금하긴 하지만 내가 그걸 꼭 알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D게이트 출구로 나와.”
 
쥬디는 어느새 카디건을 벗고 수트 자켓으로 갈아입은 반듯한 모습이었다.
 
“캐리어는?”
 
“어떤 한 놈이 왔더라구. 우리가 따라가긴 벅찰 것 같아서 누굴 좀 붙여놨어. 최종 행선지는 연락이 올 거야. 어디 가서 제대로 밥이라도 먹자.”
 
쥬디는 속도를 내며 공항을 빠져나갔다.
정신없이 따라오긴 했지만 캐리어의 최종 행선지를 알아낸다고 해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우리가 끝까지 따라잡을 걸 그랬나?”
 
신호등에서 쥬디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금테 안경 너머의 눈빛은 날카롭지도 번뜩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렌즈에 빛이 반사되면서 쥬디가 활짝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선배 시간관념 철두철미한 사람인데 오늘 나 때문에 너무 써버렸네. 미안.”
 
쥬디는 입술 한 쪽을 올리며 씨익 웃었다. 잘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너 내가 학보사 그만 둔 게 고시공부 때문인 줄 알지?”
 
“....그럼?”
 
속력을 내 달리는 차 창밖의 가로등 빛이 함박웃음을 물고 있는 쥬디의 얼굴을 훑고 지났다.
 
“영화동아리에 들어간 거였어, 학보사 때려 치고. 내가 변호사 때려 치고 언론사로 옮긴 것도 그것 때문이고.”
 
“영화?”
 
“내가 영화를 많이 좋아하잖아. 언젠가는 내 영화를 만드는 게 꿈이야.”
 
영화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만드는 게 꿈이란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쥬디는 사랑고백이라도 하는 어린 소년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쥬디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딱 떨어지게 수트 차려입는 걸 좋아하는 그가, 웃음보단 무표정이, 다정함보단 냉정함이 더 잘 어울리는 그가 영화에 꿈을 가지고 있다는 건 정말 의외였다.
 
“그래서 신문사 들어올 때도 법조부로 가라는 걸 우겨서 문화부로 간 거였어.”
 
자신의 능력만 믿고 자신은 뭐든 잘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리고 실제 잘 하기도 한다.
나는 쥬디도 그런 자신만만한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했었다.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군을 가볍게 손에서 놓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는 자유로움의 과시 같은....
 
“오늘 대머리 녀석 따라오면서 재밌는 영화를 구상해봤지. 네가 옆에 있으니까 내 감성이 말랑말랑해져서 말이야... 아, 문자 들어온다!”
 
쥬디가 외치더니 빠르게 갓길로 차를 세웠다. 그리곤 핸드폰을 열어 내 손에 넘겨주었다.
쥬디의 핸드폰 화면엔 캐리어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의 주소와 몇 장의 사진이 도착해있었다.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이상하게 한 번 쯤 들어본 이름의 아파트였다. 그리고 그 아래 하나씩 열리는 사진엔 내가 잘 아는 한 사람이 차에서 내려 캐리어를 들고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허방다리를 짚은 듯 몸이 기우뚱 하더니 단 번에 어딘가로 곤두박질 쳐졌다.
 
쥬디는 어둔 불빛 속에서 내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니....”
 
어둠 속에서 나도 쥬디를 바라보았다. 가끔 쥬디의 집에서나 볼 수 있었던 다정하고 착한 눈빛이 내게 건너왔다. 이제 더 이상 무엇을 숨길 수도 피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운전기사... ”
 
“....?”
 
“장현수 의원.... 운전기사...”
 
“국회의원 장현수....?”
 
렌즈 너머 쥬디의 눈이 내 눈에 꽂혀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쥬디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깜박이를 켜고 순식간에 도로로 뛰어들었다. 한순간에 굳어버린 아무 표정이 없는 얼굴이었다.
 
사진 속의 장소는 에프의 아파트였다. 지금은 에프 없이 한연수만 살고 있을 그들의 집이었다.
 
쥬디는 내가 사는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빠르게 달려 들어와 차를 세웠다. 하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쥬디는 가지런히 매어져 있던 타이를 풀어 뒷좌석으로 휙 날려버렸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 아니고 사랑했던, 인거구나.”
 
쥬디의 목소리는 바닥에 가라앉을 듯 낮았다.
 
“거기 오피스텔이 두 사람만의 공간이었니? 캐리어는 거기에 있던 거였고?”
 
“.... ”
 
“그 배 나온 대머리는 보좌관 쯤 되나? 아니면 비서관?”
 
“....”
 
“대답 해....”
 
나를 쳐다보지 않고 앞 유리창만 바라보고 있는 쥬디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대답 해... 미주야...”
 
“... 선배가 생각하는 대로 맞아. 그런데 선배가 왜 나를 다그치는지 모르겠어.”
 
내 말이 채 쥬디에게 건너가기도 전에 쥬디가 말했다.
 
“내가 너 사랑하니까.”
 
“....”
 
“내 마음 진심이니까.”
 
“.... 내 눈동자가 선배 앞에서 한 번도 떨린 적이 없었다며.. 그래서 사랑 안하는 거 알고 있었다며....”
 
그제야 쥬디가 내 얼굴을 똑 바로 쳐다보았다. 이제까지 그 누구에게서도 본 적이 없는, 툭 떨어져 바닥으로 사그라질 것 같은 눈빛이었다.
 
“장현수라는 거 몰랐으니까.”
 
쥬디가 차에서 내렸다. 나도 따라 내렸다. 편의점으로 들어간 쥬디는 담배와 라이터를 들고 나왔다.
 
“나도 내 감정을 잘 모르겠어... ”
 
쥬디는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켰다. 라이터 위로 솟은 불길처럼 그의 손에도 진동이 일고 있었다.
 
“내가 정치부로 온 게 문화부에서 뼈를 묻게 해준다는 부장 때문만은 아니야.”
 
입안에 갇혔던 연기가 허벅허벅 쏟아져 나왔다.
 
“장현수 때문이야.”
 
쥬디가 길게 담배 연기를 뿜으며 나를 건너다보았다. 연기에 가린 그의 표정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찡그린 것 같기도 했다. 어정쩡한 쥬디의 표정이 이상하게 내 명치 끝에 와서 갈고리처럼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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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님. 비슷한 번호로 여러 번 전화가 와 있네요.”
 
미팅 들어가면서 직원에게 충전을 맡긴 폴더폰엔 정말 같은 곳에서 보낸 듯한 번호가 여럿 떠 있었다. 국가번호가 33이고 도시 번호가 01인 걸 보니 지난번과 같은 프랑스, 파리였다. 계속 전화가 오고 있다는 건 분명 잘못 걸린 전화는 아니란 것이었다.
 
“검색 해봤어? 번호?”
 
“프랑스 파리라는 것 말고는 다른 정보는 없어요. 핸드폰이면 국번이 06인데 01인 거 보니까 일단 유선전화라는 것만 확실한 것 같아요.”
 
직원에게서 폰과 배터리 충전 코드를 받았다. 회신을 해서 대화를 한다고 해도 그쪽이 현지인이라면 기본 불어회화는 좀 할 수 있어야한다. 어눌한 불어로 알아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한다면 통화는 무의미한 게 될 것 같았다.
 
“저녁먹자. 회사 쪽으로 갈게.”
 
더블의 문자였다. 그 날 이후 처음으로 만나자고 하는 걸 보면 분명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에프의 오피스텔을 가기 위해 오후 일정을 다 끝내 놓은 상황이었다. 더 미룰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누군가를 만날 만한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에프가 떠나고 난 후부터 모든 일들이 이상하게 엇나가고만 있었다.
 
오피스텔 현관 번호판을 터치하며 문득 패스워드가 바뀐 건 아닌가 생각했지만 에프가 설정했던 대로 내 생일날짜 그대로였다.
 
오비서관이 캐리어에 담아 한연수에게 보낸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한 달 전 에프와 함께 왔을 때와 다름이 없어보였다. 한 번도 이곳을 혼자 온 적은 없었다. 늘 에프와 함께였다.
 
책상도 책도 그대로 있었다. 복층 침실의 침구도 그대로였다. 내가 사놓은 주방에 있는 커피 잔도 와인 잔도 그대로 였다. 에프와 마주 앉아 커피를 내리고 와인을 따서 향을 맡던 어떤 때가 있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책장을 둘러보다보니 책장 맨 위 칸에 큰 박스가 아슬아슬하게 떨어질 것처럼 얹혀 있었다. 아마도 오비서관이 뭔가를 꺼내가면서 건드려 놓고는 제대로 놓아두지 않은 모양이었다.
 
식탁의자를 끌어와 올라섰지만 복층 난간과 연결된 책장이라 손이 닿지 않았다. 우산으로 몇 번 박스를 쳐주었는데 박스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순식간에 내용물을 아래로 쏟아냈다. 박스 안에 들어있던 수 백 장의 사진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어떤 여자의 사진이었다.
 
알몸의 여자 사진이 온 바닥에 펼쳐졌다.
 
‘오늘 호랑이 시집보냈어. 우리 건배해야지. 어딘지만 말 해. 빛의 속도로 갈게.’
 
더블의 문자가 날아왔다.
 
‘여의도 Y오피스텔 903호. 와 줘.’
 
혼자 감당할 수 없었다. 더블이 문자를 하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불렀어야 했을 것이었다.
 
더블이 오고 있는 동안 내가 한 건 눈을 감고 있는 일이었다. 알몸의 여자가 누구든 그걸 누가 촬영했든 간에 나는 도저히 그걸 바라 볼 자신이 없었다.
빛의 속도로 달려온다던 더블은 20분이 좀 지나서야 벨을 울렸다.
 
“왜 많은 걸 인화를 해서... 컴퓨터나 핸드폰으로 보시지.”
 
더블은 내가 부탁한대로 더 이상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않았다. 내가 원했던 대로 그것들을 다 모아서 다시 박스에 담아주는 일에만 충실했다.
 
“그런데 이 분... 누군지 몰라도 나처럼 살바도르 달리를 좋아하는 것 같은 데?”
 
박스를 정리한 더블은 벽에 걸린 커다란 사진액자에 눈을 두고 있었다. 에프가 파리에서 촬영한 살바도르 달리의 조각품이었다. 그 작품은 나무둥치 중간에 흐르는 시계가 거대하게 매달려있고 왼쪽 아래엔 사람이, 오른쪽엔 천사가 조각되어있었다.
 
“기억의 영속이라는 자기 그림에 나오는 시계를 조각한 거잖아. 역시 달리는 천재야. 내가 기억의 영속이라는 그림을 보고도 얼마나 놀랐는데... 나는 언제 파리로 가서 달리미술관을 가보나... ”
 
희정이 왜 여길 꼭 정리하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피스텔에서 내가 정리해야할 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빨리 여기를 뜨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제 그만 나가자....”
 
더블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달리의 작품을 찍은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더블도 한 때 조각을 했던 기억이 있어서였을 것이었다.
 
“그래... 호랑이 시집보낸 돈으로 암소 먹어보자.”
 
더블이 아쉬운 시선을 거두며 돌아서다 책장 아래로 들어갔던 누드사진 한 장을 밟았다.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더블은 그걸 주워 시계사진 액자 귀퉁이에 꽂았다.
 
“아름다운 여체가 없었다면 세상 예술작품의 98프로는 없었을 거야.”
 
하며 돌아서는 데 사진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더블은 다시 주워서 꽂았다. 또 다시 흘러내렸다. 더블이 비뚤어진 액자를 바로 잡으려고 양손으로 액자를 살짝 들자마자 뒤에서 뭔가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그것은 단추처럼 생긴 엄지 손톱만한 카메라렌즈였다.
 
▶ 제8요일의 남자 더 보기
#1. 화요일의 남자, 튜즈
#2. 7분의 1을 넘나드는 남자, 에프

#3. ‘당신의 어둠 속에 나도’
#4. “그날,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것”
#5. 엠, 월요일을 싫어하는 남자
#6. 어떤 고백
#7. 한 잎의 여자
#8. 당신은 어디 있나요?
#9. 그 여자 미주 -내 이름은 튜즈
#10. 이미 시작된 일
#11. 말할 수 없는 비밀
#12. 점점 깊은 곳으로

<목요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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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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