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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 요약(62)

중앙선데이 2016.09.18 00:57 497호 1면 지면보기

연등회와 팔관회 시행을 강조한 '훈요십조' 부분.



불교가 고려의 ‘국교(國敎)’라는 주장은 정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언제, 누가,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했느냐는 의문을 풀어줄 분명한 글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국어사전에, 국교는 ‘국가에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여 보호되고 공인된 종교’라고 나와 있다. 국민이 전부 믿어야 하고, 그 종교의 일(敎務)을 나라의 일(國務)로 취급하는 종교가 국교다. 특정 종교의 이념과 정신이 법과 제도에 반영되어 국가의 통치 이념과 원리가 돼야 국교란 지위가 부여된다는 말이다.


[수험생과 부모가 함께 보는 NIE] -62- 불교

?고려 불교국교설을 당연시한 글들 가운데 많이 인용한 근거를 꼽자면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943년)다. 태조 왕건은 연등회와 팔관회를 중시하고, 반드시 시행할 것을 주문했다. 연등회 말고도 고려가 불교를 중시한 예는 많다. 고려는 불교와 승려를 위한 여러 제도를 만들었다. 과거시험에 승려를 위한 승과(僧科)를 두었다. 승려들은 승과를 통과해야 사원의 주지 등에 임명되었다. 또한 왕사(王師*왕의 스승)나 국사(國師*나라의 스승) 제도를 만들고 덕이 많은 고승(高僧)을 왕사·국사에 임명했다. 국왕은 새로 임명된 왕사와 국사에게 9번 절하며 제자의 예를 취했다. 이같이 고려시대엔 불교가 다른 어느 종교보다 중시됐고, 불교가 고려 사상계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으로 불교가 고려의 국교라고 하기엔 미흡하다. ? ?연등회와 함께 팔관회도 강조됐다. 원래 팔관회는 재가신도들이 8가지 금욕적 계율을 지키는 불교행사다. 하지만 고려의 팔관회는 불교 외에 다른 사상도 녹아든 행사였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팔관회를 고구려 제천행사인 동맹(東盟)에 비유했다. 태조가 강조한 팔관회는 민간신앙을 포함한 전통사상, 조상 숭배 및 제천의식을 포함했다. 불교의례만 중시된 게 아니었다.



?부처의 힘으로 고려왕조가 건국됐다는 훈요십조 1조는 불교국교설의 유력한 근거로 많이 인용되어 왔다. 그러나 왕조 건국에 도움을 준 사상은 불교만이 아니었다. 5조엔 산천의 숨은 도움, 즉 풍수지리 사상도 고려 건국에 도움이 됐다고 했다. 1조에 근거한 불교국교설은 그런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다. 오히려 1조가 작성된 취지는 승려들이 뒷날 권신(權臣)과 결탁하여 정치에 관여하거나 사원의 소유권을 빼앗는 등 불교의 폐단을 경계하는 데 있다. 또한 사원을 함부로 지어 지덕을 훼손함으로써 신라가 멸망했다는 전제 아래 승려 도선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지정한 장소 외엔 사원을 함부로 창건하지 못하게 규정한 2조 역시 같은 취지다. 불교를 언급한 훈요십조?의 1조와 2조는 불교국교설의 근거가 아니라, 불교의 폐단을 경계한 것이다. ??



?왕건은 전쟁에 시달린 민심을 달래주기 위해 불교와 음양사상을 강조했다. 반면 나라를 통치하는 데는 유교 정치이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생각은 훈요십조에도 나타난다. 국왕은 항상 역사를 공부하고, 유교이념에 입각한 통치를 하여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유교이념에 입각한 정치, 즉 군주의 어진 정치(仁政)를 강조한 것이다. ?



?성종 때(982년) 최승로는 성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불교는 수신(修身)의 근본이며,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입니다. 수신(*불교)은 내생(來生: 다음의 삶)을 위한 밑천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유교)은 지금 힘써야 할 일입니다. 지금은 가까운 것이며, 내생은 먼 것입니다.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찾는 일은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고려사 권93 崔承老 열전)



? ? ?최승로는 이렇게 “수신의 역할은 불교, 통치의 역할은 유교가 각각 맡아야 한다”면서 불교와 유교의 공존을 주장했다. ??



?고려사회는 하나의 이념과 사상이 강조된 사회가 아니라, 다양성이 존중된 다원사회였다. 고려왕조는 옛 삼국 출신의 수많은 독자적인 지방 세력을 통합하여 건국되었다. 건국 후에도 그들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협조를 얻어 왕조를 통치하려 했다. 옛 삼국의 근거지에서 독자 영역을 구축한 지방 세력의 고유한 사상과 문화를 인정하고 그것과 공존하면서, 민심의 수습과 사회의 통합을 이루어 나가려 했다. 태조의 그런 통치철학이 훈요십조에 담겨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석관의 모습. 전면에 보이는 청룡을 비롯해 백호·주작·현무 등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국민대 박물관]



?석관은 고려 장례문화와 관련된 유물이다. 석관을 통해 당시 장례 풍습을 읽을 수 있다. 어떤 용도로 사용됐을까? 석관과 함께 출토된 송자청의 묘지명엔 다음 같은 기록이 있다. ??

“1174년(명종4) 서경의 반역자 조위총(趙位寵)이 공격하자, 공(송자청)은 1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먼저 나가 화살을 맞으면서 싸워 격파했다. (중략) 공은 1195년(명종25) 3품의 벼슬로 은퇴했고 1198년(신종1) 12월 20일 병이 들어 집에서 돌아갔다(숨졌다). 영×산(靈×山) 서쪽에 장례를 지냈다가, 얼마 뒤 다시 무덤자리를 점쳐 유골을 안장했다.”(송자청의 묘지명) ??



?망자가 숨진 뒤 사흘간을 전후해 빈소에서 조문을 받은 뒤 화장 혹은 매장을 하는 요즘의 장례 형식을 단장(單葬)이라 한다. 반면 위의 기록에서는 송자청의 장례를 치른 뒤 얼마 후 다시 무덤자리를 정해 유골을 안장했다고 한다. 요즘의 장례와는 다른 형식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다음의 기록이다. ??

“공은 향년 83세다. 올해(*1144년) 봄 2월 을미일(*14일)에 집에서 돌아가셨으며, 3월 10일 신유일에 정주 땅 동쪽 기슭에 화장했다. 임금이 듣고 몹시 슬퍼하며 특별히 부의를 더하게 하고 조서를 내려 대부(大傅: 정1품)라는 벼슬을 내렸다. 가을 8월 18일 정유일에 이곳에 유골을 묻고 묘지명을 짓는다.”(허재 許載: 1062~1144년: 묘지명) ??



고려 중기의 문신 허재는 숨진 뒤 26일 만에 화장됐고, 그 뒤 5개월 만에 화장으로 수습된 유골이 다시 매장된다. 사망→화장→유골 수습과 안치→매장까지 약 6개월이 소요된 셈이다. 이런 고려의 장례 형식을 ‘복장’(複葬)이라 한다. 여러 차례 장례를 치렀다는 뜻이다. 복장은 1·2·3차 장(葬)이라는 3단계의 의식을 치른다. 사망 후 빈소를 차려 손님을 맞는 빈례(殯禮)에 이어 화장(火葬)이나 매장(埋葬)을 통해 탈육(脫肉)하는 과정을 거쳐 유골을 수습하는 단계가 1차 장이다. 묘지명 기록에 따르면, 사망 후 대체로 5일에서 29일 사이에 화장을 한다. 화장 외에 시신을 땅에 매장해 탈육하는 경우 약 8~20개월이 걸린다. 12세기 중반부터 불교의 영향으로 매장보다는 화장이 보편화된다. 이어 유골을 수습한 뒤 사찰 등에 임시로 안치해 제사를 지내는 단계를 2차 장이라 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 기간은 4개월에서 6년4개월까지 차이가 많다.

유골을 담는 뼈항아리(골호). 통일신라기에 제작된 것으로 국보 125호로 지정됐다.



? ?고려 장례 풍습은 오랜 기간 제례를 올리는 것을 망자에 대한 예의로 생각했다. 이 기간 동안 망자의 안식처이자 후손의 발복지(發福地)인 길지를 택하고, 분묘를 조성하며 석관과 묘지명 및 부장품을 준비한다. 하지만 유골을 사찰에 방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복장을 치르는 데 과다한 비용이 든 탓에 유골을 방치한 경우가 적지 않았고 국가가 경비를 지원해 장례를 마무리하는 관행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찰에 안치된 유골은 석관에 담겨 매장됨으로써 장례 절차가 최종적으로 마무리된다. 이를 3차 장이라 한다. 석관은 이같이 복장식 장례에 필요한 물품이었다. ??



?통일신라 문무왕(661~680년 재위)은 자신의 장례를 화장으로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때부터 화장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다. 원래 화장은 불교와 관계없이 신석기 시대에 발생해 청동기·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일대에서 성행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행해진 화장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삼국·통일신라시대를 거쳐 불교가 발달된 고려 때 성행했다. 고려 때 화장은 승려뿐 아니라 왕족·귀족과 민간 일부 계층까지 확산됐다. 석관은 이런 과정에서 부각된 문화재다.



?모발과 피부는 물론 뼈까지 태우는 화장을 해야만 망자가 극락으로 갈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석관은 망자를 서방정토로 이끌어주는 도구였던 것이다. 그래서 화장 후 유골을 수습한 뒤 일정기간 안치해 제례를 올린 후 다시 석관을 만들어 유골을 정성스럽게 담아 매장했다. 그렇지만 화장이 고려의 일반적인 장례 풍습은 아니었다. 고려의 일반 주민은 시신을 바로 땅에 매장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것조차 어려워 들판에 시신을 놓아두는 풍장(風葬) 같은 ‘단장’(單葬)을 했다. 묘지명의 주인공이 왕실·관료층과 그 가족이듯이, 석관도 관료·지배층 장례문화의 일부였다.



- 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제330호 2013년 7월 6일, 제338호 2013년 9월 1일, 339호 2013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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