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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商 울리는 곗돈 사기

중앙일보 2016.09.15 00:01
서울 은평구 연서시장의 한 귀퉁이에서 채소를 다듬어 파는 이상배(67ㆍ여)씨 손에는 흙 때가 굳은살처럼 박혀 있다. 설과 추석 당일, 합해서 이틀을 제외하곤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15년째 병상에 누워있는 남편과 지적 장애가 있는 40대 아들을 부양하는 이씨의 낙은 겟돈 타기였다. 은행 갈 시간을 내기 힘들고 계좌이체도 할 줄 모르는 그에게 계는 목돈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씨는 최근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계주 한모(70)씨가 곗돈을 가로챈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로 서울 은평경찰서에 붙잡혀 있다는 것이었다. 한씨는 이 시장 상인 29명을 대상으로 14억원을 빼돌렸다. 이씨가 받아야 할 돈도 7000만원이 넘었다. 그는 “오래 알고 지낸 한씨를 철석같이 믿었다. 남편 병원비 걱정에 하늘이 노랗다”고 말했다.

전통시장 노상(老商)들을 노린 계 사기가 잇따라 발생했다. 지난 6월에 노인과 영세 상인들을 상대로 4억7000만원 빼돌린 천모(63)씨가 서울 구로경찰서에 붙잡혔고, 같은 달 부산에서도 정모(55)씨가 기장시장 상인 90여 명의 곗돈 9억6500만원을 빼돌려 구속됐다.

계는 전통 시장에서 은행 노릇을 한다. 상인들이 주로 돈을 붓는 것은 ‘번호계’다. 매달 또는 매일 일정액을 내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곗돈을 타는 방식이다. 곗돈을 늦게 탈 수록 이자가 더 붙는다. 급전이 필요해 앞 번호로 겟돈을 받으면 뒤 사람들이 받을 이자를 내게 된다. 대출과 저축의 기능을 동시에 가진 셈이다. 사람을 모아 계를 조직하고 순번을 정해 곗돈을 주는 일을 맡은 계주가 곧 은행이다. 연서시장에서 떡집을 운영하는 김모(73)씨는 “계주들은 대부분 한 시장에서 수십 년간 계를 운영해 상인들과 깊은 신뢰 관계가 형성돼 있다. 계주가 ‘곗돈을 가로챈다’는 건 시장 사람들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고 말했다.

시장상인들은 현금 거래를 많이 하지만 은행에 가는 일을 번거롭게 여긴다. 한 상인은 “우리들 중에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쓰는 법도 모르는 이가 많다”고 말했다. 게다가 계는 일반 금융기관보다 이자율이 높다. 안전 장치가 없는 사금융인 계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은평경찰서의 경찰관은 “계주가 돈을 착복해도 사기 의도가 명백히 드러나지 않으면 처벌하기 어렵다. 이자에 욕심부리다가 원금을 날리기 십상이다“고 말했다.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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