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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바람결에 흩날리고 강을 따라 떠도는 #6

중앙일보 2016.09.1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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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여행가는 용기를 내어 우두머리에게 말했다.
 
“미안하오.”
 
우두머리는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짐이 되는 듯해서…….”

 
우두머리는 호탕하게 웃으며 다른 장사치들에게 그가 한 말을 전했다. 여행가의 말이 전달되는 데에 따라 고요하던 사막에 파도치듯 웃음이 넘실거렸다. 비로소 여행가는 이제까지 이들이 그를 내버려 둔 게, 그에게 못되게 군 게 아니라 이런 과정이 일종의 신입 신고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다른 이가 그를 도울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자기 몫으로 배정받은 낙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직접 길들여야 했다. 지금 앞뒤에서 능숙하게 낙타를 타는 이들 모두 여행가와 같은 경험을 했으며, 따라서 느긋하게 기다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애초에 처음 낙타를 타는 그에게 유독 다루기 까다로운 아마를 건넨 것도 그들이었다. 그들과 그의 차이는 그들은 아주 어릴 때 이 과정을 겪었다는 것뿐이었다.
장사치들은 검은 사막이 짙푸른 색으로 바뀔 무렵이면 낙타 다리를 묶고, 기둥을 박아 낙타털로 짠 양탄자를 쳤다. 낙타 몸에 술을 다는 건 털이 빠지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여행가는 그들이 야영을 준비하기 전 낙타 다리를 묶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이들은 땅에 매여 살지 않으며 전 재산을 가지고 다녔다. 땅을 가진 자들은 짐승을 땅에 묶었다. 떠돌며 사는 이들은 다리를 묶어 돌아다닐 거리를 줄였다.

여행가가 보기에는 가도 가도 똑같은 모래벌판이었다. 낮에는 폐에 화상을 입을 듯 뜨거운 공기를 마시며 시꺼먼 땅을 따라 걸었다. 낙타들도, 짐도 저녁이면 검은 모래바람을 맞아 시커멓게 물들었다. 다른 이들은 각기 자기 낙타에게 쌓인 모래를 털어 주었지만 여행가는 여전히 제 한 몸 오르고 내리는 것만도 버거워 낙타까지 돌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밤에는 언제 더웠냐 싶게 급격히 기온이 떨어졌고, 깊은 어둠이 자리했다. 장대비처럼 쏟아질 듯 빛나는 별이 아니면 하늘과 땅을 구분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양털로 짠 양탄자를 몇 겹이나 두른 천막 안에 들어갈 때마다 혹독한 추위를 피할 수 있다는 데 감사했다.
우두머리는 길도 없는 곳에서 별과 자기만의 방향감각으로 길을 인솔해 사나흘에 한 번은 우물이 있는 마을에 갔다. 낙타들은 그때마다 우물로 달려가 며칠 버틸 물을 마셨다.
장사치들은 사막에 있는 우물 대부분이 최소한 2,000년 전에 만들어졌다며 그때는 사막을 횡단해 사막 끝에 있는 도시를 오가는 큰 무리의 장사치들이 있었다고 했다. 여행가는 우두머리에게 사막을 끝까지 건너 본 적이 있나 물었다. 우두머리는 길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말했다.
 
우물곁에 있는 마을은 적으면 서너 가구, 많아야 열 가구 남짓했다. 검은 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눈이 크고, 낙타처럼 속눈썹이 길고 풍성했으며, 머리는 짙은 모래색이었다. 방문객이 거의 없는 마을이라 찾아오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해 양고기와 양 내장을 볶은 음식을 내오고, 북과 피리를 연주해 춤을 추며 작은 잔치를 열었다.
여행가는 이들이 내주는 낙타 젖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여행가는 사막 물이 떫어 마시기 괴로웠다. 장사꾼들의 짓궂은 농담은 서너 마을을 지나치며 제법 능숙하게 받아치는 법을 익혔지만 물맛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마을을 떠난 지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장사꾼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여행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장사꾼들이 모래 폭풍이 몰려온다고 말했다. 그들은 기둥을 깊이 박고, 낙타들을 한군데에 모으며 분주히 모래 폭풍에 대비했다. 여행가도 서툰 솜씨로 그들을 도왔다.
 
오래지 않아 여행가도 바람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모래가 드러난 얼굴을 따끔따끔하게 쳤다. 그는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땅 밑 깊은 곳에서 잠을 자던 태고의 거인이 하찮은 것들은 모두 쓸어버리기로 작정하고 일어선 듯했다.

여행가는 하늘까지 닿는 검은 바람에 눌려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절망에 찬 탄식이 들렸다. 모래바람이 만들어낸 거인이 단지 한 발을 내딛는 걸로 온 세상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장사치들이 그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바람 소리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장사치들은 다들 양탄자를 뒤집어쓰고 무거운 물건에 자기 몸을 묶고 있었다. 몸짓을 보건대 그에게도 뭐든 덮고 잡을 걸 찾으라는 듯했다. 작은 자갈이 여행가의 어깨를 스쳤다. 여행가는 정신을 차리고 아마를 찾았다. 아마는 어느새 바닥에 납작 주저앉아 있었다. 바람과 사투하며 아마 등에서 그를 묶을 줄을 찾는데 체구가 작아 늘 천막을 칠 때 꼭대기에 오르던 이가 돌풍에 휩쓸려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일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순간 그가 날아간 물건을 잡으려 뛰어 올랐나 했다. 여행가는 반쯤 정신이 나가 아마와 아마의 몸에 묶인 양탄자 사이로 기어들어가 웅크렸다. 바위도 날리는 폭풍 소리인지, 사람과 낙타의 단말마인지 확실하지 않은 소리들이 귀를 먹먹하게 했다.

여행가는 제발 사람 소리가 아니길, 폭풍이 지나가면 날려간 사람이 무슨 일 있었느냐는 듯 옆에 서서, 첫 폭풍에 놀라 헛걸 봤느냐고 놀리길 바랐다. 무언가 무거운 것이 등을 치고 갔다. 그는 어느 틈에 정신을 잃었다.

여행가는 아마가 모래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치는 몸짓에 정신이 들었다. 그는 늙은 낙타를 따라 가까스로 모래더미에서 빠져나왔다. 낙타는 혼자 달려갔다. 여행가는 저도 모르게 뒤를 쫓았다. 가까스로 따라잡아 낙타가 몸을 빼는 걸 어르고 달래 짐을 확인했다. 그간 쓴 여행기와 붓은 무사했다. 안심하고 사방을 둘러보니 지난밤이 거짓말처럼 평온하게 펼쳐진 사막 위에 서 있는 건 그와 낙타뿐이었다. 그는 소리쳐 사람을 부르다 황망하게 여기저기 파 봤지만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다시 낙타 짐을 확인했다. 낙타가 여행가에게 못되게 굴어 짐을 제대로 내리지 못한 게 상황이 바뀌니 잘 된 일로 물주머니, 말린 양고기, 칼과 잡다한 도구를 담은 주머니가 고스란히 있었다. 그는 싫다고 몸부림치는 낙타에게 매달렸다.
 
“낙타야, 아니, 아마야, 아마야, 너와 나 둘뿐이다. 싫어도 함께 가야 해.”
 

그는 놓치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낙타 고삐를 잡아 앞으로 나아갔다. 아까 놓쳤으면 어쩔 뻔했는가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처음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폭풍이 불었을 때 바로 옆에 있었으니 만큼 가다 보면 일행과 합류하려니 했다. 여행가는 우두머리에게 들은 설명대로 별자리를 가늠해 방향을 잡았다.
 
날이 저물었다. 그는 혼자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낙타를 부여잡고 밤을 보냈다. 다음 날에도 끝없는 사막만 이어질 뿐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우두머리처럼 우물이 있는 마을을 찾을 재주가 없었다. 때로는 바로 저 언덕만 넘으면 누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때로는 다른 방향으로 몇 시간만 걸으면 마을이 있는데, 방향을 잘못 잡은 거면 어쩌나 하는 절망 속에서 사막을 걸었다.
낙타는 지나가다 보이는 선인장을 씹으며 연명했다. 그도 선인장을 잘라 나오는 즙에 손가락을 찍어 맛봤다가 기겁을 하고 침을 뱉으며 아까운 물만 소비했다.
 
어느덧 해가 지고 다시 밤이 다가왔다. 밤에는 손가락 두 개만 한 전갈이 기어 나오는데, 물리면 한 시간을 못 넘기고 죽는다 했다. 장사치들은 밤이면 전갈 구멍을 찾아 물을 부어 전갈이 나오면 밟아 죽였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물을 전갈을 잡는데 쓸 수 없었고, 장사치들처럼 구멍을 보는 눈도 없었다. 장사치들이 가리킬 때면 잘만 보이던 구멍이 혼자 남으니 이건지, 저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문제는 전갈만이 아니었다. 땔감이 없어 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밤마다 그저 전갈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안장으로 쓰는 모포를 둘둘 감고 낙타 옆으로 갔다. 아마는 그가 붙으면 밀쳐냈다. 혼자서는 밤의 추위를 감당할 수 없기에 다시 달라붙었다. 아마는 매일 밤 서너 번 거부하다 못 이기는 척 받아 주었다.
식량이 떨어져 갔다. 그는 마을에서 본 기억을 더듬어 막대에 고리를 만들었다. 사방을 살피며 걷다 들쥐 구멍을 발견해 막대를 넣었다. 세 시간을 씨름한 끝에 겨우 한 마리 건졌다. 그는 들쥐 목을 부러뜨려, 마른 관목을 모아 불을 지폈다. 땔감이 모자라 제대로 익지 못한 부분도 그냥 먹었다. 그는 들쥐를 잡고, 드물게 마주치는 선인장 굴뚝새의 둥지에서 알을 훔쳐 먹으며 간신히 목숨을 연명했다.
 
“아마야, 나 좀 살려다오.”
 
그는 마른 관목이 보일 때마다 집어 아마 등에 올리며 사정했다. 아마는 몸을 흔들어 떨어뜨렸고, 그는 다시 주워 올렸다. 그렇게 서너 번쯤 반복하면 또 새침하니 받아 주었다.
사막은 세상 어느 곳보다 하늘과 가까운 듯했다. 태양은 대지 바로 위에서 뜨겁게 타올랐고, 밤이면 별이 바로 코앞에서 총총히 빛난다.
그는 저물녘이 오면 소소한 일이라도 꼭 적었다. 날짜를 헤아리기 위함이었다. 보름이 지나자 물이 떨어졌다. 선인장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아마도 야위어 갔다. 장사치들이 아마에겐 이번 여행이 마지막이리라 했었다. 늙은 낙타는 차츰 힘이 빠져갔다.
 
“아마야, 어쩔 수 없구나, 응?”
 
아마가 싫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몸을 뒤로 뺐다.
 
“너도 힘들잖니, 응?”
 
그는 아마를 어르고 달래 몸에 있던 장식 술을 빼서 버렸다. 아마는 앙탈을 부리면서도 결국은 받아들였다. 수십 개는 되던 술을 버리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여행가는 새벽에 일어나 모래에 묻은 이슬을 핥고 태양을 보며 방향을 가늠했다. 어딘가 마을이 있을 것이다. 분명 도시가 나올 것이다. 누군가 만날 것이다. 그는 아마를 일으켰다. 아마는 평소보다 심하게 성질을 내며 일어나려 들지 않았다.
 
“나한테 뭐가 있는지 볼래?”
 
여행가는 품을 뒤져 빗을 꺼내 아마의 털을 빗질해 주었다. 검은 모래가 우수수 떨어지고, 낙타의 본래 색이 나타났다. 그간 제대로 빗어주지 못해 아마가 달고 다닌 모래 무게도 만만치 않을 듯했다.
 
“좋네, 예쁘네. 이쪽으로 빗어 볼까?”
 
술을 모두 버리고 눈에 띄게 침울했던 아마가 일어났다. 여행가는 아마의 몸을 두드리며 정말 예쁘고 착한 낙타라는 말을 반복했다. 아마는 혼자 성큼성큼 걸었다. 그가 가려는 방향과는 반대쪽이었다. 아마가 늘 하는 실랑이를 하려니 싶어 어르고 달랬지만 들은 척 만 척이었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는구나! 날더러 뭘 더 어쩌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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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낙타 뒤를 쫓아갔다. 낙타는 고집스레 엉뚱한 방향으로 몇 시간을 걸었다. 여행가는 처음으로 더는 가망이 없다 여기며 체념했다. 낙타가 멈췄다. 여행가는 아마 앞에 있는 돌 뚜껑에 달려들었다. 화강암으로 된 우물 뚜껑은 너무 크고 무거웠다.
 
“혼자는 못 하겠다.”
 
그는 줄로 뚜껑을 묶고, 다른 쪽은 아마에게 묶으려 했다. 아마는 몸서리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
 
“왜? 넌 목이 마르지도 않단 말이냐?”
 
여행가는 또 튕기는가 싶어 달래기도 하고, 포기한 듯 딴청을 부리다 갑자기 줄을 던져 보기도 했지만 아마는 여행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양 그때마다 이리저리 피하며 몸에 줄을 묶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지친 여행가는 도대체 왜 이러는가 싶어 황망히 아마를 쳐다보았다. 아마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다. 넌 물 냄새를 맡았는데, 나는 화를 냈지. 내가 잘못했구나.”
 
여행가가 마침내 깨달아 말했다. 그는 안장 겸 이불로 쓰는 양탄자를 한 조각 길게 잘라 목덜미에 모양을 잡아 묶어 주었다.
 
“장식 술들, 버리지 말고 조금만 더 참아 볼 걸 그랬지?”
 
아마가 콧등으로 여행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여행가는 순간 당황했으며, 감동받았다. 그는 지금까지 의무적으로 아마에게 말을 걸었다. 때로 짐승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자기 신세를 한탄했다. 하지만 아마는 사람만큼, 아니 사람 이상으로 섬세하고 영리한 존재였다.
 
“고맙구나.”
 
그는 아마 몸에 줄을 묶어 함께 당겼다. 뚜껑이 열리자 아마부터 마시게 했다. 아마는 소리도 시원하게 물을 들이켰다. 여행가는 아마가 충분히 마셨다가 몸을 뗀 다음에 물을 마셨다. 떫은맛이 이처럼 반갑고 달 줄 몰랐다.
갈증이 가시자 배가 고팠다. 그제 뱀을 잡아먹은 후 내리 굶었다. 사막에는 우물만 휑하니 놓여 있을 뿐 사람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가 아니었다면 지척에 두고도 지나쳤을 것이다.
여기서 기다리다 보면 누군가 이 우물을 찾아올 것인가? 그는 우물을 면밀히 살폈다. 아무리 희망을 가지려 해도 오래도록 사람이 찾지 않은 듯 보였다.
그는 물주머니를 있는 대로 채웠다. 아껴 마시면 3~4주는 버티지 싶었다. 하지만 아마는 어쩔 것인가. 먹을 것도 넉넉하지 못하고, 충분히 쉬며 보살핌을 받지 못해 점점 약해가는 아마가 걱정이었다.
 
“가자, 아마야……, 이 우물을 통째로 들고 가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구나.”
 
그는 아마를 다독여 기약 없는 길을 걸었다. 바람 소리는 사람이 부르는 소리 같았고, 선인장들은 사람이 손짓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한참을 걷다 문득 멈춰 주위를 둘러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사막에서, 그는 모래 한 알, 점 하나일 따름이었다.
마지막 물주머니가 말라갈 무렵 멀리 도시가 보였다.
 
“아마야!”
 
그는 아마를 재촉했지만 아마는 서두르지 않았다. 여행가는 애가 탔다. 설마 또 헛것을 보는 건가? 아니, 분명 도시였다.
 
“아마야, 가자, 가야 한다.”
 

아마가 길게 콧바람을 내뿜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발걸음을 빨리했다. 높이 솟은 돌기둥들이 보였다. 환영이 아니었다. 여행가는 마음이 급해 넘어질 듯 걸음을 옮겼다.
도시 앞에 도착해서야 폐허가 된 도시임을 알았다. 지붕과 벽은 이미 수세 기 전 무너지고, 더 이상 받칠 것도 없는 기둥만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기둥 둘레는 장정 서너 명이 팔을 뻗어 두를 법하고, 높이는 30m는 넘을 듯했다. 기둥마다 사람 얼굴과 함께 글자를 새겨 놓았다. 사람 얼굴은 도시에서 중요한 인물의 얼굴일 터이고, 글은 그 인물들의 업적이겠으나 처음 보는 글자였으며 누군지 알 도리가 없었다. 여행가는 혹시나 하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도시를 헤맸지만 헛수고로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미 수 세기 전에 버려진 도시였다.
 
다시 어둠이 사막과 사막 속 작은 점인 도시와 점 속의 점인 여행가를 덮었다. 여행가는 한때 융성했으나 이제는 정적만이 남은 도시를 떠돌다 돌로 만든 덕에 지붕이 살아남은 건물을 찾았다. 그는 횃불도 양초도 없이 어둠 속을 손으로 더듬어 누울 곳을 찾았다. 골목을 따라 죽은 자의 흐느낌 같은 바람이 불었다.

제대로 돌아보려면 며칠은 잡아야 할 만큼 큰 도시니 수천, 수만은 살았을 것이다. 입구에 있던 기둥은 이 도시에 들어오는 자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용도니 교역하던 다른 도시들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으나 많은 이들이 태어나 자라고 직업을 얻고, 짝을 지어 아이를 낳으며 각자의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용맹한 장군도, 뛰어난 지도자도, 제 욕심에 취해 도시민들을 괴롭힌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살았을 터이나 평범했던 이도, 위대했던 이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며, 누구도 그들을 알지 못했다. 아마도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차츰 커져, 긴 세월 번성했을 도시인데도 이 넓은 세상 속 그 누구도 이 도시의 이름도, 이런 도시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가 사막에서 죽고 나면 이 도시는 또다시 시간 속에 묻혀 사라질 것이다. 지금 잠시, 그 하나가 이 도시를 안다 해 무엇이 달라질까.....

사람들이 살며 이룬 모든 것이 미약한 흔적만을 남긴 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여행가는 삶과 죽음의 무상함이 주는 인간 존재 본연의 고독에 사로잡혔다. 그는 더 이상 이 고독을 감당하며 길을 걸을 자신이 없었다. 어느새 흐르는 눈물이 그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으며, 그마저 말라갔다. 그는, 인간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이 사막의 모래 한 알일 따름이었다.
그는 절망 속에서 검고, 깊어 끝을 알 수 없는 사막을 바라보았다. 다시금 쏟아지는 덧없는 눈물을 막고자 고개를 드니, 뿌연 시야 너머로 형언하기 어려운 빛이 보였다. 여행가는 화급히 눈물을 닦았다. 땅만 보면 어둡고 컴컴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으나 하늘은 활짝 열려 태곳적부터 사막을, 사막을 너머 온 세상을 비춰 온 별을 쏟아 내고 있었다.
저 별이 많을 것인가, 사막의 모래알이 많을 것인가. 아니, 수를 비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저토록 찬란하게 빛나는 것에 무슨 상념을 더 보태는가. 사막 또한 저 별들 아래서 보면 한 점이지 않겠는가. 시리도록 빛나는 저 별들도 그처럼 점 하나 아닌가.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눈물이 떨어졌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빛나는 점 하나로 영원 그 이상의 하늘을 지켜 온 별들 아래서 절망이 가당키나 할 것인가…….
별들은 알 것이다. 언제 이 도시가 세워졌는지, 어떤 사람들이 살다 떠났는지, 언제 스러졌는지, 변함없이 밤하늘을 밝히며 보았을 것이다. 모든 것을 지켜보고, 지금은 그를 보는 별들이 위대한 것도, 초라한 것도 모두 언젠가 시간 속에서 스러지니 스러짐을, 죽음을 겁내지 말고 걸으라 말하는 듯했다. 여행가는 소리 없이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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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장편 [지우전 : 모두 나를 칼이라 했다], [부엉이 소녀 욜란드],
작품집 [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 [각인]을 출간하고 다수의 공동 작품집에 단편을 수록한 이 인간의 작업 책상에는 컴퓨터, 프린터/스캐너 복합기, 지난 밤 마신 맥주 캔, 고양이가 있다. 네 발 달린 아해가 책상을 오르내리며 키보드를 밟아도 오타는 모두 작가의 책임이라는 게 냉엄한 현실.

오늘도 글을 쓰며 고양이와 키배, 아니 키보드 쟁탈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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