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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의 와인 이야기(5) ‘와인 폭탄주’를 왜 마시냐고요?

온라인 중앙일보 2016.09.15 00:01
진지한 와인애호가라면, 와인에 다른 음료나 식재료를 섞는 행위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를 칠 것이다. 하지만 와인 문화가 발달한 유럽에서조차 와인을 다른 음료나 식재료와 섞어서 마시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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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레드 와인을 양주와 맥주에 섞어서, 붉은 핏빛이 도는‘ 드라큘라주’를 원샷하는 기이한 광경이 술자리에서 종종 목격됐다. 필자도 동석한 일행의 강권에 못이겨 마지못해 몇 번 마셔보기는 했으나, 일반 폭탄주보다 특별히 더 맛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폭탄주의 효용은 뛰어난 맛이라기 보다는, 짧은 시간 내에 참석자들의 취기를 오르게 하는데 있다고 본다면, 드라큘라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효과적이긴 했다.

와인을 다른 음료와 섞어 마시는 관행은 우리 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와인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던 1970년대 일본에서는 프랑스 부르고뉴의 최고가 와인인 로마네 콩티(Romanee Conti)에 고가 샴페인인 돔 페리뇽(Dom Perignon)을 섞어 마시기도 했다.

따로 마셨을 때보다 맛이 더 좋아진다거나, 시음자들의 취기를 더 빨리 오르게 할 목적은 물론 아니었다. 콩티-페리뇽을 만들어 마신 이유는 오로지 주최자의 재력을 과시하는 데 있었다. 최근 고급 와인 소비가 늘고 있는 중국에서 보르도 1등급 그랑크뤼인 샤토 라피트 로스칠드(Chateau Lafite Rothschild)에 콜라를 섞어 마신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이 같은 이야기가 급격하게 부를 축적한 아시아 국가들을 폄하하기 위해 서양인들이 지어낸 말이라고도 한다. 직접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같은 견해도 일리가 없지는 않은 듯 하다.

| 와인을 다른 음료와 섞어 마시면 야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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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소주와 섞어마신 이탈리아 소아베 와인 마시(Masi)와 수아비아(Suavia).

진지한 와인애호가라면, 와인에 다른 음료나 식재료를 섞는 행위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를 칠 것이다. 이들은 “자연이 만들어낸 순수 포도즙을 그대로 발효시켜서 만든 와인에 다른 이물질을 넣다니, 그런 야만적인 행동이 어디 있어!”라고 고함이라도 지를 게다. 나도 한때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와인 문화가 발달한 유럽에서조차 와인을 다른 음료나 식재료와 섞어서 마시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이란과 이라크 국경 부근에 있는 자그로스 산맥에서 발견된 7천여 년 전의 신석기 유물에서는 포도즙의 흔적 속에 송진 찌꺼기가 발견됐다.

신석기인들이 방부제로 와인 속에 송진을 넣어 마신 증거다. 유리병과 코르크 마개가 고안되기 이전에 와인의 산화를 막을 특별한 방법이 없었기에 와인 속에 송진을 첨가한 것이다. 이 전통은 지금도 그리스 일부 지역의 와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럽의 고대 유물에서는 와인에 꿀이나 허브, 향신료 등의 첨가물을 넣어 마신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는 조악한 당시 와인의 품질을 조금이라도 감추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전통은 그리스를 거쳐 로마시대까지 이어졌다.

그리스 시대에 성행했던 심포지움에서 철학을 강의하던 소크라테스의 와인잔 속에는 달콤한 꿀이 첨가되었을 공산이 크다. 또한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는 평민들이 와인을 물로 희석시켜서 오늘날의 맥주와 비슷한 도수의 알코올 음료를 즐겨 마셨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유럽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여름이 유난히 무더운 스페인에서는 ‘샹그리아’라는 음료가 인기를 끈다. 레드와인에다가 레몬과 오렌지 등 시트러스 과일을 썰어 넣고 약간의 설탕을 타서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차게 마신다.

기호에 따라서는 약간의 탄산음료를 첨가하기도 한다. 반대로 한겨울 유럽의 스키장에서는 레드 와인에 여러 가지 식재료를 첨가하여 따뜻하게 데워서 마신다. 프랑스에서는 이를 뱅쇼(Vin Chaud)라고 하고, 독일에서는 글뤼바인(Gluehwein)이라 부른다. 레드 와인에다가 오렌지, 복숭아 등 과일과 함께 꿀과 정향을 넣고 보글보글 끓여서 따뜻하게 즐기는 음료다. 물론 샹그리아나 뱅쇼를 만들 때에는 저렴한 와인을 사용한다.

| 이탈리아 소아베 와인에 소주를 섞었더니

개인적으로, ‘와인 폭탄주’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깨뜨리게 된 계기는 생선회와 어울리는 와인을 찾는 과정에서 발견했다. 생선회를 먹을 때 어떤 와인을 마시면 좋을까를 고민하면서, 이런 저런 와인들을 마셔봤다. “생선회와 레드 와인은 상극이다”라는 와인계의 정설마저도 의심하여 여러 종류의 레드 와인들을 생선회와 매칭시켜 보기도 했다.

역시 정설은 정설이 된 데 이유가 있었다. 레드 와인의 탄닌이 생선의 비린 맛을 증폭시켜서 와인과 생선 둘 다 맛 없게 만들어 버렸다. 샴페인 등 발포성 와인도 그리 나쁜 마리아주는 아니었으나, 기포가 생선의 맛을 방해하는 듯 했다. 화이트 와인도 샤도네이, 소비뇽블랑, 리즐링 등 풍미가 강한 품종의 와인은 섬세한 생선회의 맛을 압도해서 좋은 궁합이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풍미가 강하지 않은 화이트 와인을 찾게 되었고, 적절한 후보로 이탈리아 북동부 베네토(Veneto)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아베(Soave)라는 화이트 와인에 주목하게 되었다. 소아베는 단순한 와인이다. 사과, 배, 허브, 그리고 견과류의 옅은 풍미를 지닌 가벼운 바디감을 가졌다. 더운 날, 그늘에 누워 부담 없는 소설책을 읽으면서 마실 만한 와인. 이 와인이면 생선회와 궁합이 잘 맞겠다는 생각에, 마침 횟집에서의 모임에 한 병 들고 나갔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이 모임에 나온 다른 일행들이 와인을 그다지 즐기는 분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생선회를 앞에 두고 소아베를 킁킁 거리면서 마시는 내 꼴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나 역시 소아베의 지나치게 가벼운 바디감 때문에 생선회와의 매칭이 만족스럽지 않던 참이었다. 나 때문에 억지로 소아베를 두어잔 마신 일행이 보다 못해 “거 참, 이제 그만하고 소주나 마십시다!”하고 짜증을 냈다.

겸연쩍게 소주를 시켜서 한두 잔 마시던 순간, “소아베를 소주와 섞으면 바디감이 살아나서 생선회와 어울리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일행들에게도 한 잔씩 제조해 주고는 맛있다는 반응을 얻었지만, 아마도 속으로는 애쓰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서 억지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게 아닌가 싶다.

맛이나 분위기를 배가시켜 주는 경우, 와인을 다른 음료나 식재료와 함께 섞어 마시는 행위는 얼마든지 용납될 수 있고, 용납되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마셔본 적이 없는 콩티-페리뇽이나 라피트-콜라도 어쩌면 나쁘지 않은 조합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를 직접 경험해 보려면 로또 1등에 당첨된 후에나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이석우 - 카카오 공동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중앙일보 편집국 디지털총괄 겸 조인스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다. 번역서『와인력』을 출간한 와인 마니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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