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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법성포 굴비의 독백 "부정부패 앞에 비굴한 사람들 때문에 굴비 외면당해"

중앙일보 2016.09.12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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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비 [사진 영광군]

내 이름은 굴비(屈非)랍니다. 전남 영광군 법성면(법성포)이 자랑하는 명물이죠. 머리에 선명한 다이아몬드 표시와 황금색 배 부위가 매력적이에요. 서해 바다에서 올라온 생선 참조기로 만들어져요. 사람들은 나를 '밥도둑'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노릇노릇하게 구우면 짭쪼름하고 고소한 맛이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게 할 정도로 맛이 일품이라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죠. 예전에는 정말 귀해서 집안의 어른이나 맛볼 수 있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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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비엮걸이 [사진 영광군]

법성포 주민 대다수는 우릴 팔아 번 돈으로 생계를 이어가요. 법성포에만 굴비 가게가 350곳이 넘거든요. 영광군에는 모두 460여 곳이나 된다고 해요. 연간 판매량은 1만9520t, 돈으로 따지면 3000억원대라니 어마어마하죠.

주인 아저씨 같은 법성포 굴비 상인들은 예년같으면 1년에 두번 쉴 틈도 없이 가장 바빠요. 추석과 설 대목 때죠. 명절 매출액이 1년 전체의 88%를 차지하거든요. 명절을 앞두고는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 우릴 배송해달라는 전화 주문이 쏟아지는 데다가 직접 보고 고르겠다며 이 곳 현지에 있는 가게로 찾아오는 손님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죠.

그런데 이번 추석을 앞두고는 사정이 달라졌어요. 가게 앞 주차장은 텅텅 비었어요. 우리를 가득 담아 전국에 보낼 택배 상자를 만들던 상인 아주머니·아저씨의 일손은 멈췄어요. 가끔 찾아오는 손님들마저도 10~20마리씩 엮어져 '10만원' '20만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은 우리를 손에 들었다가도 그냥 놓고 돌아서요. 나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비교적 맛이 떨어져 가격이 저렴한 '부세'를 대신 데려가는 사람들도 있구요. 육지로 치자면 '꿩 대신 닭'인 셈이죠.

그래서인지지 추석 명절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우리 가게 주인 아저씨 얼굴에는 오늘도 기쁜 표정을 찾을 수 없어요. 주인 아저씨는 추석을 앞둔 지난 일요일 아침 일찍부터 가게 문을 열었는데 찾아오는 손님이 없었거든요. 가게 한 쪽에 놓인 TV방송 연예오락 프로그램에서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오지만 아저씨는 넋이 나간 표정이에요. "아이고 '김영란법'이 뭔지…." 깊은 한숨을 내쉬네요. 28일부터 시행되는 김영란법을 대하는 우리 마을 아주머니·아저씨들의 숨김 없는 표정이랍니다.

내 문제를 놓고 고민해온 법성포 아저씨·아주머니들은 이번 추석 명절은 포기하기로 하셨나봐요. "이번 추석 명절은 그냥 보내고 다시 만나자"는 말들을 자주 하세요. 이대로라면 1400억원대의 피해가 날 것이라고 하면서요.

하지만 모든 상인들의 생각이 같은 건 아니에요. "이번 기회에 10~20마리를 엮어 파는 전통방식에서 벗어나 질 좋은 굴비 1~2마리를 먹기 쉽게 손질해 5만원 미만의 가격에 판매해보자"는 상인들도 있거든요. 김영란법에 걸리지 않으려면 선물 가격이 5만원을 넘으면 안된다니까 나름 묘안을 짜내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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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보리 굴비 [사진 영광군]

아 참. 아는 분들을 아시겠지만 굴비(屈非)라는 내 이름은 고려시대 때 처음 붙여졌어요. 고려 17대 왕인 인종 때 난을 일으킨 이자겸이 법성포에 유배를 왔어요. 여기서 굴비 맛을 본 뒤 매료됐다고 전해지죠. 그는 영광 칠산 앞바다에서 잡힌 참조기에 염산의 천일염으로 간을 한 뒤 바닷바람에 건조시켜 '굴비'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그리고는 인종에게 진상(進上)했다죠. 굴비라는 이름에는 말 그대로 '비겁하게 굴하지 않겠다'는 강인한 뜻이 담겼어요. 귀양살이 중이었지만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뜻이었죠.

주인 아저씨는 김영란법이 돈과 향응, 값비싼 선물 앞에서 그동안 비굴하게 처신해온 일부 공직자와 언론인 때문에 만들어졌대요. 예컨대 고급 외제차를 뇌물로 받은 혐의로 구속된 김수천 부장판사나 고교 동창에게서 향응을 제공받은 김형준 부장검사 같은 법조인들, 공적자금이 투입된 대우조선해양의 돈으로 초호화 외유성 출장을 다녀온 조선일보 주필 출신 송희영씨 같은 사람들 얘기인가 봐요. 곰곰히 따져보니 황당하고 억울하네요. '(부정부패에) 비겁하게 굴복한' 사람들 때문에 그동안 '굴하지 않는다'는 이름 처럼 지조를 지켜온 나에게까지 억울하게 불똥이 튀겼기 때문이죠.

우리를 '비리의 상징'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한 두름(20마리)에 50만원, 100만원이 넘을 정도로 몸값이 비싼 굴비들을 선물받는 사람들이 때로는 부정청탁도 함께 받았기 때문이겠죠. 그렇다고 10만원 안팎인 굴비 선물도 못하게 하면 생계가 막막해진다는 게 주인 아저씨의 하소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굴비에서 풍기는 특유의 비린내를 탓하죠. 그런데 따져봅시다. 생선에서 비린내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요. 그런데 요즘 하루가 다르게 터져나오는 인간세상의 부정부패 소식을 생각하면 굴비의 비린내보다 더 역겹고 구린듯해요. 부정부패의 구린내는 세상을 혼탁하게 하잖아요. 하지만 영광보리굴비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풍미를 제공하고 행복감을 선사하죠. 추석 명절 처럼 온가족이 오손도손 둘러앉아 단란하게 식사할때가 특히 그렇죠.

지금 기성세대가 대한민국의 부정부패를 극복하지 못하면 후손들이 차례상에 굴비를 올려도 볼 낯이 있을까요.

우여곡절 끝에 시행되는 김영란법이 앞으로 대한민국에 부정부패의 구린내를 없애고 굴비의 고소함이 가득차면 좋겠네요.그러면 우리 법성포 아저씨·아주머니들도 '건강한 웃음'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김영란법 시행 전 마지막 추석을 맞아 절대 비굴해지고 싶지 않은 굴비가 답답한 마음에 해본 넋두리였습니다. ^^

영광=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이 글은 '김영란 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시행을 앞두고 지난 11일 추석 대목에도 시름에 빠진 전남 영광군 법성포 굴비 상인들을 상대로 취재한 내용을 '영광 굴비' 입장에서 의인화해 재구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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