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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40년 외줄타기 삶 김대균 명인

중앙일보 2016.09.1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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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타기 김대균 명인을 만나러 가며 줄곧 기억을 더듬었다.

20년은 족히 지난 기억이다.

분명 그를 만나 사진을 찍었었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였는지, 어느 지면에 어떻게 실렸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나마 기억이 나는 건 그를 엄청나게 고생시킨 사실이었다.

슬라이드 필름으로 사진을 찍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기자 초년병 시절이었으니 내 사진에 확신이 없던 때였다.

그래서 족히 백 번 이상 하늘로 솟구치게 했던 것 같다.

하다 하다 지친 그가 이런 말을 했었다.

“저는 속바지를 입지 않고 줄을 탑니다. 피 멍이 들고 들어 이미 굳은살이 배었지만 오늘은 고통스럽네요.”



서울에서 과천까지 가며 줄곧 더듬어 기억해낸 게 이것이었다.

아홉 살에 시작해서 줄타기 인생 40년이 되었다고 했다.

시간을 가늠해보니 서른 즈음에 그를 만난 게다.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했다.

그의 굳은살이 여전한지 묻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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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 야생화자연학습장 한 편의 공터에 그의 훈련장이 있었다.

야트막한 산 중턱이었다.

먼발치에서 어린 친구 여럿이 줄을 타는 게 보였다.



30cm 높이부터 2m의 높이까지 모두 다섯의 줄이 매어져 있었다.

줄마다 어린 친구들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어린 친구들로 향해 있었다.

하나하나 살피는 시선에서 걱정과 대견함이 읽혀졌다.

뜨거워도 너무나 뜨거운 8월의 폭염에 그는 그렇게 훈련장에 나와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훈련장 귀퉁이에 앉았다.

먼저 옛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엔 그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가 사진과 포즈를 기억해냈다.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당시에 속 보호대를 안 한다고 하셨잖아요. 이유가 뭡니까?”

“줄을 온몸으로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보호대를 하면 줄을 온몸으로 못 느끼잖아요. 처음엔 매일 피가 터져 나와 하얀 무명옷에 밸 정도였죠. 상처가 아물 시간도 없이 매일 줄을 탔으니…. 그러다 보니 굳은 살이 배었죠.”

침도 들어가지 않을 굳은살이라며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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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두고 싶은 적은 없습니까?”

한동안 답이 없었다.

한참 동안 하늘을 물끄러미 보더니 답을 했다.

“왜 없었겠어요. 아홉 살에 시작해 밥 먹고 줄만 탔으니 사춘기도 모르고 지났죠. 스승이신 김영철 명인이 돌아가고 나서 정체성 혼란이 왔습니다. 다 늦게 사춘기도 왔습니다. 술과 담배도 그때 배웠습니다. 스무 살 갓 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그냥 내가 해야 하는 것이구나’.

내가 안 하면 그 오랜 세월의 명맥이 끊어지는 거잖아요.

그때부터 마음을 다시 잡고 제가 모자란 부분을 공부했습니다.

소리, 음악, 재담을 배우려 공연 마친 후 매일 용인에서 서울로 다녔습니다.

제가 타고난 재능은 없어도 우직한 거는 있습니다.

뭘 해도 더디지만 그래도 끝까지 가기는 꼭 갑니다.”



그렇게 우직했으니 2000년엔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독보적인 줄타기 명인이 된 이유이기도 했다



“이 훈련장은 뭡니까?”

“과천시에서 내어 준겁니다. 제 나이 쉰입니다. 이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올해를 원년으로 전승체계를 바로 세우기로 다짐했습니다. 다른 전통 예술과 달리 저 혼자이니 비빌 언덕도 없잖아요. 이렇게 해서라도 명맥을 이어야죠.”

이야기를 하면서도 거의 시선이 제자들에게 향해 있었다.

전수교육관이나 상설공연장이 없이 뙤약볕에 훈련을 하는 제자들, 그들이 대견해 보였다.

그중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애가 있었다.

여덟 살이라고 했다.

김 명인은 그 어린이를 두고 꼭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다고 했다.



줄과 함께 살아온 인생이니 줄을 타며 사진을 찍어야 했다.

김 명인이 채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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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겨울용보다 두꺼운 양말을 꺼내어 신었다.

그런데 엄지 발가락이 쑥 나왔다.

얼른 사진을 찍었다.

겸연쩍게 웃으며 뭘 이런 걸 찍냐고 그가 말했다.

구멍난 양말 또한 그의 역사이거니와 우리 줄타기의 역사이기에 기록해 두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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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갈아입고 각반을 찼다.

헤질 대로 헤져 누더기처럼 변한 가죽 각반이 눈에 들어왔다.

놓칠 수 없는 장면이었다.

“뭘 또 이런 것까지 찍습니까?”

“그 각반에서 김명인의 역사가 느껴집니다. 얼마나 된 겁니까?”

“글쎄요? 스승님에게 물려받은 거니 꽤 오래되었죠.”

언제부터 비롯되었는지 말하지 않아도 그 자체가 줄타기의 역사였다.

박물관에 있어야 할 각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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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두건을 두르고 초립을 쓰며 조그만 손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한 치의 삐뚤어짐도 허락하지 않는 의식처럼 경건했다.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어이”라는 우렁찬 기합을 넣었다.

그 소리에 놀라 자빠질 뻔했다.

준비가 다되었다는 신호, 산을 울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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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을 타기 전에 그가 웃으며 말했다.

“딱 한번 만에 끝내시죠? 몸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이십 년 전에 고생시킨 게 맘에 걸려 아무 대꾸도 못하고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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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발을 내딛는 그의 표정이 돌변했다.

엄숙했다.

훈련을 하던 제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몸으로 보여 주는 교육이었다.



이제 본격적인 촬영을 해야 했다.

내가 먼저 땅바닥에 누워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 찍을 준비를 했다.

하늘 위에서 줄과 함께 노니는 모습을 담기 위해서였다.

산 중턱이라 사방으로 둘러쳐진 나무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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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비상하는 ‘잔노릇’을 하기 전에 그가 몇 가지 포즈를 취해줬다.

그가 기억해낸 20년 전의 동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줄 위였건만 안방만큼 편안해 보였다.



그가 ‘잔노릇’을 준비하며 다시 기합을 넣었다.

그의 기합소리를 받아 나도 기합을 함께 넣었다.

딱 한 번이라 했으니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가 줄의 반동을 이용해 하늘로 솟구쳤다.

하늘에서 노니는 딱 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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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찍은 사진을 확인해보니 낭패였다.

사진에선 얼굴이 보이는 둥 마는 둥 했다.

얼굴이 다리에 가린 탓이었다.

쉰의 나이가 무색한 힘찬 다리 놀림이 얼굴을 가려 버린 것이었다.

딱 한 컷의 승부였는데 아쉬움에 탄식만 나왔다.



그에게 사진을 보여줬다.

나보다 그가 더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그가 말했다.

“다시 하죠.”

너무나 반가운 말이었다.



그에게 부탁을 했다.

“다리 힘이 넘치십니다. 다리 힘을 좀 빼주십시오. 얼굴 안 가릴 만큼만요.”

그리하마 답을 하고 그가 다시 솟구쳤다.

그런데도 힘이 넘치기는 마찬가지였다.
또 얼굴을 가린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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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다시 하겠다고 했다.

힘을 뺐다. 그랬더니 동작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가 또다시 하겠다고 했다.

그는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난 땅 바닥에 누워 유격하듯 좋은 위치를 찾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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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했는지도 모를 정도의 반복이었다.

그게 그의 삶이었다.

“더뎌도 가기는 꼭 간다”고 했던 그의 말 그대로였다.

우직하게 될 때까지 해온 명인의 삶은 그렇게 만들어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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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립을 벗으며 땀 범벅인데도 웃던 그의 표정,

앞으로 가야 할 명인의 길이 보였다.

10년 후 그의 줄타기 인생 50주년에 다시 보자는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 내내 땀 범벅인 그의 웃음이 따라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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