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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집 밖에서 냉장고 문을 열다

중앙일보 2016.09.07 00:01 강남통신 1면 지면보기
| 돈을 걷어낸 집, 삶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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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박 공유기업 에어비앤비와 건축가 하세가와 고가 지은 ‘요시노 향나무 집’. 2층은 숙소로, 1층은지역 주민들에 개방하는 콘셉트다.




| 일본 ‘하우스 비전’에서 만난 집의 12가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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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비전 프로젝트기획자 하라 켄야. 파나소닉과 유코 나카야마가 사물인터넷을 적용해 만든 집. 집안을 채우는 전자제품 대신 흰 벽을 통해 필요한 정보와 기술을 얻을 수 있다. 벽면 숫자에 아이패드를 대면 증강 현실로 미래 주택을 볼 수 있다. (위의 큰 사진에 그림을 합성했다)

일본 디자인의 구루라 불리는 하라 켄야(58), 프리츠커 수상자 도요 이토(75), 구마 겐코(62), 시게루 반(59), 후지모토 소우(45) 등 지금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이 모여 집을 한 채씩 지었다. 도면이나 축소 모델이 아니라 당장 살아도 되는 실제 크기의 집이다. 지난달 28일까지 도쿄 오다이바 아오미역 근처에서 열렸던 ‘하우스 비전(House Vision) 2016 도쿄 전시회(이하 하우스비전)’를 위한 프로젝트였다.

집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아이디어를 담아 지은 12개의 건물은 사치스런 문구로 현혹하는 명품 아파트 모델하우스 같지도, 그렇다고 SF 영화에서나 볼법한 미래적인 집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내일부터 내가 들어가 살아도 좋을 것 같은, 진짜 집이었다.

하우스 비전의 출발은 하라 켄야다. 그는 개를 위한 건축이라거나 햅틱(Haptic)·리디자인 등의 전시 기획을 통해 ‘사건’을 디자인하며 디자인의 차원을 넓혀온 인물이다. 2013년 초 하라 켄야는 집을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다양한 산업의 교차점으로 바라 보고 첫 번째 하우스 비전 프로젝트를 내놓았고, 이번이 두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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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배송 기업인 야마토 홀딩스와 후미에 시바타가 협업한 주택. 냉장고·간이옷장을 집 밖에 둬 사람이 없을 때도 신선식품·세탁물 등을 배송 기사가 넣고 갈 수 있도록 했다. 고령화·1인 가구를 염두해 뒀다.


이번 하우스 비전의 주제는 ‘코-디비주얼(Co-dividual)’이다. 함께(co)와 개인(indivisual)의 합성어인 코-디비주얼은 사람들이 더 이상 한 지붕 아래 같이 살지는 않지만 언제나 연계해 살아가고자 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일본은 고도성장을 이끌던 주요 기업들이 몰락하고 있는 가운데 경기 침체와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감소, 고령화 같은 여러 난제를 한꺼번에 겪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개인간·세대간 의사소통에 대한 스트레스 역시 높아지고 있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하라 겐야는 집을 사적인 공간이거나 재산 증식을 위한 투기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본다. 현대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의학·에너지·통신·서비스 등 여러 산업과 만나 새로운 단계의 제품으로 발전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서의 가능성을 포착했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하우스 비전에서 만나는 집들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사회적인 문제 속에서 무사히 살아가기 위한 실용적인 처방전이라고 볼 수 있다. 올해는 에어비앤비를 비롯해 도요타, 파나소닉, 릭실(Lixil·주택설비자재업체), 무지, 츠타야 서점을 선보이는 CCC(Culture Convenience Club) 등 내로라하는 기업 12곳이 각각 건축가와 짝을 이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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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배송 기업인 야마토 홀딩스와 후미에 시바타가 협업한 주택. 냉장고·간이옷장을 집 밖에 둬 사람이 없을 때도 신선식품·세탁물 등을 배송 기사가 넣고 갈 수 있도록 했다. 고령화·1인 가구를 염두해 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10.5cm 나무 각재만을 사용해 지어 올린 입구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1만2519?규모의 전시장 전체 디자인을 맡은 건축가 구마 겐코는 집과 광장, 마당, 카페가 모두 연결된 하나의 마을처럼 접근했다. 모든 집은 저렴하면서도 재활용이 가능한 소재인 나무를 사용해 지었다. 츠타야 서점과 카페가 있는 매표소를 지나 첫 번째 만나는 집은 물류배송 기업 야마토 홀딩스(Yamato holdings)와 산업 디자이너 후미에 시바타(Fumie Shibata)의 ‘외부에서 냉장고를 열 수 있는 집’이다. “바깥에서 냉장고를 열 수 있는 집을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이 건물은 집 안에 사람이 없을 때 물품을 전달하는 대문 역할을 하는, ‘문을 하나 더 두는 삶(life with one more door)’를 제안한다. 사람이 드나드는 출입문 외에 밖에서도 바로 냉장고를 열 수 있게 한 작은 문을 통해 부패할 우려가 있는 신선 식품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외에도 노년층을 위한 의약품 박스, 세탁물 박스 등으로 확장해 집에 사람이 없을 때에도 언제든 편리하게 물건을 주고 받을 수 있게 한다. 집에 아무도 없어 필요한 물건을 제때 전달받지 못하거나, 배송 기사가 되돌아가는 수고를 문을 하나 더 만들어 해결하겠다는 과감한 아이디어다. 야마토 홀딩스와 함께 설계한 이런 서비스 경험은 물론 모바일 알람과 보안 문제 등을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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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비앤비가 제시한 게스트하우스 1층. 지역민들이 와서 교류할 만한 공간으로 꾸몄다.


하우스 비전에서 관람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집 중 하나는 세계적인 숙박 공유 기업 에어비앤비와 건축가 하세가와 고가 지은 ‘요시노 향나무 집’이었다. 하세가와 고는 “인근 지역민에게 숙소를 공유해 노령화한 시골 마을에 활기를 되찾아주는 동시에 지역 사회에 경제적인 도움까지 줄 수 있는 방안으로 찾은 모델”이라고 이 집을 설명했다. 품질이 좋기로 명성이 자자한 나라현 요시노의 향나무를 이용해 지은 2층짜리 집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2층은 에어비앤비에 등록된 숙박 공간, 1층은 마을 주민에게 개방된 공간이다. 지나가던 동네 주민들도 언제든 툇마루에 앉을 수 있고 현지에서 자라는 향나무와 편백나무로 만든 식기와 특산물이 준비된 1층에서는 숙소를 예약한 여행객이 언제든 주민과 어울릴 수 있도록 했다. 이 집은 전시가 끝난 후 요시노에 그대로 옮겨질 예정이다. 그곳으로 돌아가 게스트 하우스로 사용되고 수익금은 요시노에 재투자될 예정이다. 지역 사회가 공유하는 공간으로 기획한 건축물이 고향으로 돌아가 실제 하우스의 ‘비전’을 실행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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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용품 브랜드 무인양행(아뜰리에 보우&와우 협업)이 만든 도시와 농장의 2중 주택으로 도시농부의 삶을 상상했다.


요시노 향나무 집에서 이웃으로 넘어가니 일본 히라가나 글자 の(노) 같은 나선형의 둥근 흰 벽으로 감싸인 집이 보였다. 파나소닉과 건축가 유코 나카야마가 세운, IoT(사물인터넷)가 곳곳에 녹아든 ‘히라가나-노 나선형 집’이다. 일단 집에 들어가기 전에 입구에서 목에 걸 수 있는 아이패드를 하나씩 받았다. 그리고 둥근 벽을 따라 아이콘을 하나씩 찍어보니 증강 현실로 미래의 생활방식을 소개하는 애니메이션이 떠올랐다. 이제 집으로 입장.

요즘 최고의 화두 IoT로 무장한 집은 요란한 첨단 신기술의 향연이 아니라 싱거울 정도로 단순했다. 중앙에는 작은 침실, 욕조와 변기, 부엌처럼 필요한 최소한의 가구와 가전제품이 배치되었고 이 집의 핵심이자 안과 밖을 연결하는 피부 역할을 하는 흰 벽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얻고 영상을 시청하고 AI 기반의 보안 시스템을 누린다. 느슨하고 비어 보이지만 IoT로 빈 틈 없이 치밀하게 연결된 집이다. 사물인터넷이 표준 기술이 되면, 집을 채우던 전자 제품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이렇게 최소화되고 단순한 삶이 될지도 모른다.

이 곳에 서서 멀리 내다보면 블록을 탑처럼 쌓은 집이 보인다 임대주택 관리 회사 다이토 트러스트 건설과 건축가 후지모토 소우가 함께 임대주택을 새롭게 디자인한 임대 타워(Rental space tower)다. 임대 주택은 항상 사적인 공간을 극대화하고 공용 영역은 복도로만 국한해왔다. 하지만 이 집은 거꾸로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요소인 침대, 수납장, 화장실만으로 이뤄진 개인 공간을 7~16㎡으로 최소화했고 부엌, 도서관, 텃밭 등 공유 공간을 최대화했다. 추가적으로 필요한 공유 시설은 블록처럼 쌓아 올리기만 하면 된다. 또 사용하지 않는 일부 공간은 비거주자에게 시간 단위로 대여해준다. 후지모토 소우는 “노년과 청년, 학생, 싱글, 젊은 부부들이 모여 사는 이런 형식의 임대타워는 공유 공간이라는 새로운 연결고리 덕분에 따로 또 같이 하는 작은 마을처럼 지낼 수 있게 해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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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업체 TOTO & 창호업체 YKK AP(이가라시준& 푸지모리 타이지와 협업)는 창문을 길게 늘이고 그 공간에 침실·욕실·거실을 넣은 부채꼴형 집을 완성했다.


건축 자재와 주택 설비 기기를 생산하는 기업 릭실과 건축가 시게루 반은 욕실과 부엌을 당당하게 주인공 삼았다. 생활에 꼭 필요한 욕조 욕조, 변기, 부엌, 세면대를 한 곳에 모은 라이프 코어를 핵심 요소로 제안한 것이다. 또한 건축의 재료로 종이 튜브를 이용한 시게루 반답게 합판들 사이에 종이 벌집을 끼워 넣은 PHP 패널로 우리가 익히 보아온 무겁고 튼튼한 건축물 대신 가볍고 튼튼한 집을 지었다. PHP 패널을 사용하면 비용이 적게 들고 이동이 쉬우며 공사기간이 짧아 이미 재난 지역의 구호용 주택에 활용되고 있다. 이외에도 농장과 도시의 이중 거주 공간을 상상한 무지와 아틀리에 바우와우의 타나타 테라스 사무실 등 모든 집들은 하나하나 이 시대의 화두와 고민거리를 담아 지어졌다.

지난 해 부동산 가치가 아닌 ‘좋은 집’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진 전시 ‘즐거운 나의 집’을 기획한 이재준 리마크프레스 소장은 “주택 산업의 패러다임이 구매에서 임대로 변화하고 있으며, 개인 중심의 현재 삶이 중요한 화두가 된 시대”라며 “래미안 이후 브랜드 아파트를 만든 국내 건설사들은 미래 첨단의 편리한 주택을 개발하려는 데 반해, 하우스 비전은 현재 실현 가능한 좋 은 집을 우선적으로 생각했다는 차이가 있다”고 했다. 하우스 비전은 ‘미래 일본의 집은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답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인데, 이는 비단 일본만이 아니라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우리 역시 함께 풀어야 할 숙제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오랫동안 주택의 터무니 없는 가격에 놀라 좋은 집, 내가 살고 싶은 집이 무엇인지 생각조차 못하고 살아왔다. 부동산 개발 시대에 제한된 땅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주거 공간을 만드느냐가 곧 돈이 되던 시대가 이제 거의 끝나가고 집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고 가족의 형태도 달라지면서 셰어하우스처럼 따로 또 같이 사는 삶에 대한 실험도 이어지고 있다. 아파트 광고가 불러일으키는 욕망이 아니라 사람들의 다양한 욕망에 따라 고를 수 있는 집은 앞으로 더욱 많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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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주택 관리업체 다이토 트러스트 건설과 후지모토 소우는 임대주택에 대한 시각을 바꿨다. 부엌·도서관 등 공용 공간을 늘리는 대신 오히려 침대·수납장 등 개인 공간을 최소화한 것. 또 상황에 따라 필요한 공간들을 블록 쌓듯 늘리고 줄이는 식으로 설계했다.


글=전은경 월간 <디자인>
편집장 사진= HOUSE VISION 운영위원회(www.house-vision.jp), 전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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