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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잘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남자

중앙일보 2016.09.03 00:01 종합 2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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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소설가

신혼인 그녀는 퇴근한 남편에게 점심 식사 메뉴를 묻곤 했다. 영양이 안배된 식탁을 차려주기 위해서였다. 남편은 대체로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나중에는 생각해보는 기색도 없이 “몰라”라고 잘라 말했다. 신혼의 그녀는 친구였다. 친구는 이야기 끝에 결론지었다. “몇 시간 전에 먹은 음식이 기억나지 않는 게 말이 되니? 남자들 기억은 참 편리해.”

실제로 인간의 기억 작용은 편리하다. 기억은 당사자의 심리적 생존에 유익한 방식으로 경험을 편집 저장하는 기능이 있다. 프로이트는 최초의 정신분석 치료에서 내담자들이 중요한 사실은 기억하지 못하면서 무의미한 기억은 보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후 학자들은 주체가 경험을 저장할 때 그것을 선별하는 기준과 장소에 관심을 기울었다. 정신분석에서 기억은 주체의 상징적 역사이자, 무의식에 이르는 연결 고리라 여겨진다.

기억이 특별히 억압된 성적 경험이나 환상을 숨기고 있을 때 프로이트는 그것을 ‘덮개 기억(screen-memory)’이라 불렀다. 차폐 기억, 은폐 기억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덮개 기억은 그것이 실제 경험이든 유아기 환상이든 수많은 심리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심리적 문제의 본질이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덮개 기억은 감추면서 동시에 비밀을 누설한다. 꿈이나 신경증처럼 억압된 관념, 정서, 욕동을 모르는 새에 흘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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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증상을 숨기는 작용뿐 아니라 경험을 새롭게 채색하는 기능도 한다. 주체가 이상화된 자기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삶의 의미를 재구성하기 위해 경험을 아름답게 덧칠해 마음에 저장한다. 아예 삭제된 듯 보이는 기억도 있다. 심리치료를 받는 이들은 자주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고 말한다. 치료를 통해 자아가 강해지면 회피해온 경험을 바로 인식할 힘이 생기고 그 속에 내포된 의미도 알아차린다. 기억나지 않는 과거가 많은 사람, 무엇인가를 떠올리기 싫어하는 사람은 그만큼 마음이 아픈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친밀한 관계에서든 공식 석상에서든 질문을 받고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하는 남자를 흔히 목격한다. 그런 언행은 그 자체로서 이미 무의식을 드러낸다. 점심 식사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남자의 내면에는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많거나, 그런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친구 부부는 결혼 10년쯤 지나면서 별거 상태가 되었다. 기억의 마음 작용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는 듯했다.

김형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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