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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시시각각] 김정은 “승리 중의 승리”

중앙일보 2016.09.01 20:34 종합 3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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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논설위원

김정은이 8월 24일 “성공 중의 성공, 승리 중의 승리”라고 흥분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은 동북아 안보질서의 게임체인저로 평가된다. 잠수함이 한·중·일·러가 붙어 있는 한반도 바닷속이나 미국의 괌·하와이 근처를 헤집고 돌아다니다 어떤 각도에서든 핵미사일 한 방을 날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북한의 미사일들은 육상의 고정식이나 이동식 발사대에서 날아갔다. 한국 영토를 겨냥할 경우 어떤 경우든 남쪽을 향할 것이므로 우리의 각종 탐지 레이더, 요격 미사일들은 모두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SLBM 잠수함이 한국 후방의 3면 바다를 깊숙이 남하해 핵이나 생화학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뒤에서 쏘면 속수무책, 막아낼 방법이 없다. 숱한 비용이 들어가는 온갖 군사적 대책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실제 효과를 보려면 6~7년은 소요된다고 한다. 그때까지 한국인은 말하자면 SLBM 면역결핍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다.

 우리 국방부는 기술적으로 북한의 SLBM 실전 배치 시점을 향후 1~3년 정도로 보고 있다. 김정은이 대선을 몇 달 앞둔 내년 하반기께 SLBM 실전 배치를 선포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최근 연속적인 처형(處刑) 정치에서 보듯 김정은의 광적이고 포악한 행태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 대중의 불안과 공포 심리를 파고들어 “김정은에게 특사를 보내겠다. 평화협상을 벌여 SLBM 발사만은 막아보겠다”는 공약도 등장할 것이다. 2013년 김정은의 핵실험 때도 정치권에서 특사·협상론이 나왔다. 김정은이 협박적으로 요구하는 수천만이나 수억 달러를 평화의 비용으로 내줘도 괜찮지 않으냐는 호응 여론이 퍼질지 모른다.

 사실 김정은에게 핵·미사일은 군사무기가 아니다. 정치·경제·외교·통일 분야에서 북조선의 국가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 수단이다. 2012년 이윤걸씨에 의해 공개돼 논란은 있지만 상당한 신빙성이 인정된 ‘김정일의 유서’를 보자. 김정일은 아들에게 “남조선을 군사적으로 제압한 상태에서 경제·문화 교류를 시작하라”고 지침을 준다. 지금 한국은 유서대로 북한한테 ‘군사적으로 제압’당했다. 김정은의 다음 수순은 ‘경제 교류’다. 이 문제에 대해 김정일 유서는 “우리에게서 남조선의 경제발전은 큰 기회다. 우리의 군사적 위력이 결정적임을 남조선 당국자들에게 인식시켜라”고 쓰고 있다. 군사적으로 한국이 감히 대들지 못하게 해놓고 그 경제력을 흡입하라는 얘기다.

 외교 전략에서 김정일은 “핵, 장거리 미사일, 생화학 무기를 끊임없이 발전시켜라”고 당부한 뒤 “미국과의 심리적 대결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합법적인 핵 보유국으로 올라섬으로써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유서대로 김정은은 압도적인 대남 핵 우위를 확보했다. 미국을 심리적으로 위축시키려 한다. 실제 우리 국방부는 8월 29일 국회 보고서에서 “북의 SLBM에 대응능력 불충분. 미국 본토까지 위협 가능”이라고 평가했다.

 남북 전시상황이 발생하면 미국의 정부나 의회, 여론은 북 핵의 본토 보복 가능성을 우려해 증원병력의 한국 파견을 망설이게 될 것이다. 김정일은 또 “중국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국가이지만 앞으로 가장 경계해야 할 나라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를 가장 힘들게 했다”고 강조했다. 김정은은 아버지의 유언을 실천에 옮겼다. 친중파 장성택을 처형해 중국 지도부를 충격에 빠뜨렸다. 중국에 굴하지 않고 핵실험을 두 차례나 밀어붙였다.

 김정은은 아버지 때부터 20년간 전략적 목표와 수순에 따라 대량살상 국가 체제를 한 발짝 한 발짝 완성해 왔다. 한국은 5년 단위로 정권이 온탕냉탕 바뀌면서 기껏 군사적·전술적으로만 대응했다. 앞으로 승패의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국방예산으로 한 해 40조원을 쓰는 나라가 한 발 제작에 100억원도 안 드는 SLBM의 등장에 이토록 무력할 수야. 문제는 군사가 아니다. 국가전략을 세우지 못하는 리더십과 얄팍 빈약한 정치·선거 시스템에 나라는 시나브로 망가지고 있다. 

전영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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