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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킷이 비뚤어졌네" 옷 만지며 가슴을…성추행과 오해의 경계 '틈새 추행'

중앙일보 2016.09.01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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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전 옷 매무새를 다듬다가 손등으로 가슴을 푹 누르더라고요. 처음 봤는데 ‘골반이 넓어서 항상 임신 조심해야겠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성희롱 아닌가요?”

고려대생 김모(24)양은 지난달 학교 앞 H사진관에서 취업사진을 찍고 나오다 수치심에 눈물을 흘렸다. 사진사의 성추행과 성희롱성 발언 때문이었다. 사진을 찍기 전부터 “예쁘게 찍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후 사진사는 ‘재킷이 비뚤어졌다’며 옷을 만지다 가슴을 건드렸고, 촬영이 끝난 뒤에는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김양은 “단둘이 좁은 공간에 있는 상황에서 무섭기도 하고 너무 당황해서 아무 대처도 못했다. 무기력하게 있다 사진관을 나온 후에야 서러워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H사진관의 성추행은 피해를 본 또 다른 학생이 고려대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면서 공론화됐다. 이후 “나도 기분 나빴다”는 글이 줄을 이었고, 댓글을 통해서도 20여명의 학생들이 피해 경험을 털어놓았다. 이들 대부분 처음에는 ‘단순 실수’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행동을 반복하자 의도적인 성추행을 의심했지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고려대 재학생 주모(23)양은 “신고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증거도 없고 고시생 신분이라 복잡한 일에 휘말리기 싫어 포기했다”고 말했다. 고려대 양성평등센터 관계자는 “사진관이 학교와 관계없는 외부 업체라 당장 고발하기 어렵다. 피해 학생들을 직접 접촉해 사례를 모은 뒤 대응 방안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H사진관의 사례처럼 ‘틈새 추행’의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이 늘고 있다. 의도적인 성추행인지 단순 실수인지 헷갈리는 데다, 신고하더라도 뚜렷한 증거를 확보하기 어려워 가해 남성들은 혐의를 부인하기 일쑤다. 경찰에 따르면 피해자들도 “성추행인지 아닌지 헷갈리는데 어쨌든 기분이 나빴다”는 식으로 진술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서울경찰청 여성계 관계자는 “성범죄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적용되긴지만, 틈새 추행은 CCTV 등을 확보하지 않는 이상 증거가 없고 성추행과 무의식적 행동의 경계에 있는 경우가 많아 처벌이 어렵다”고 말했다.

최근엔 더 악질적으로 변하는 추세다. 엉만튀ㆍ슴만튀(엉덩이나 가슴을 만지고 도망가는 행위) 등의 신종 성추행이 대표적이다. 실제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해 5월부터 1년간 길거리 성추행 사례 130여건을 분석한 결과 이 중 21건이 엉만튀ㆍ슴만튀 성추행이었다. 직장인 박민들레(31)씨는 지난 18일의 경험 이후 명동이나 종로 등 인파가 많은 곳에 가기를 꺼린다. 박씨는 “누군가 뒤에서 손을 뻗어 가슴을 꽉 부여잡았는데 그 순간 너무 당황해서 소리도 못 질렀다”며 “정신을 차리고 뒤돌아보니 수많은 사람 중 누가 그랬는지 확인할 길이 없어 범인 찾는 걸 포기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틈새 추행의 주요 원인으로 ‘성 인식 지체 현상’을 꼽는다. 성범죄와 관련한 여성들의 인식은 예민해졌지만 남성들의 ‘성 감수성’이 이를 따라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최근 성범죄 피해에 대한 여성들의 인식은 굉장히 날카로워졌지만, 반면 일부 남성들은 여전히 둔감하다”며 “틈새 추행을 없애기 위해선 ‘이 정도쯤은 괜찮겠지’라고 구시대적인 성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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