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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경의 Shall We Drink] <31> 호숫가 도자기 굽는 도시, 그문덴

중앙일보 2016.09.0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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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문덴의 상징, 호수 위 오르트 성은 백조처럼 고아한 순백의 자태가 환상적이다.


“호수야? 바다야?”
오스트리아의 잘츠카머구트(Salzkammergut)에 처음 온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한다. 수평선이 아득한 물가에 서면 여기가 호수인지 바다인지 헷갈린다. 바람에 물결이 일 때면 더욱 그렇다. 오스트리아에는 바다가 없다. 대신 수많은 호수가 있다. 특히 빈(Wien)과 잘츠부르크(Salzburg) 사이 잘츠카머구트에 집중돼 있다. 해발 2000m가 넘는 알프스의 산맥 사이로 76개의 호수가 반짝인다.

그 가운데 트라운(Traun) 호수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깊다. 수심 191m, 폭 3㎞, 길이 12㎞에 이른다. 깊고 넓은 호수 주변에는 중세에 소금 무역으로 번성한 도시, 그문덴(Gmunden)이 있다. 호숫가의 토양이 비옥해 17세기부터 도자기 산업이 발달하며 예술가와 기술자가 몰려들었다. 조금 과장하면, 오스트리아 사람의 절반은 갖고 있다는 국민 도자기 ‘그문드너 케라믹(Gmunden Keramik)’ 덕분이다. 지금도 그문드너 케라믹은 그문덴 시내의 공장에서 오직 그문덴의 흙으로 도자기를 빚는다. 그래서 그문덴의 애칭은 ‘도자기의 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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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옆 시청사. 시계탑에 달린 종 24개가 하루 5번 슈베르트의 ‘숭어’를 연주한다.


19세기에 이르러 증기 유람선과 요트가 등장하자, 그문덴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브람스, 슈베르트 등 음악가들의 휴양지로 유명해졌다. 지금도 트라운 호수 위엔 요트가 점점이 떠 있다. 1872년 첫 항해를 시작한 증기유람선 기제라(Gisela)는 유유히 호수를 가르며 나아간다. 호수 한가운데는 순백의 오르트 성(Shloss Ort)이 한 마리 백조처럼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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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문드너 케라믹의 상징, 그륑거플람트 문양.


푸른 호수 옆 연둣빛 시청사에는 옛 흔적이 오롯하다. 자세히 보면 시청사 시계탑에는 도자기 종 24개가 매달려 있다. 하루 5번 ‘종악’도 울린다. 종이 울리며 슈베르트의 ‘송어’를 연주한다. ‘시계탑이 다 거기서 거기지’하며 지나칠 뻔했던 여행자도 목이 빠져라 올려다볼 만큼 영롱하고 청아한 선율이었다. 음악을 듣고 나니 ‘그문드너 케라믹’이 한층 궁금해졌다. 달인들의 도자기 제작 현장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공장견학을 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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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이 손으로 그륑거플람트를 그리는 모습.


“이게 그문드너 케라믹의 상징, 그륑거플람트(Grüngeflammt)입니다. 녹색으로 불꽃을 형상화한 패턴이죠. 이 접시 하나를 만드는 데 60단계가 넘는 작업을 거칩니다. 모두 100% 수작업이고요. 그럼 지금부터 제작 과정을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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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문드너 케라믹의 또 다른 상징, 사슴 문양의 접시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


물레 성형 후 가마에 굽고, 구운 그릇 위에 그림을 그리는 등 도자기 제작 과정은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웠다. 단계마다 숙달된 도공들이 능숙한 손길로 도자기를 매만지고 있었다. 나무망치로 툭 치는 소리로 도자기에 하자가 없는지 판단하는 이의 모습은 진지했고, 그륑거플람트나 사슴 그림을 그리는 이의 모습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직원 130여 명이 믿음직한 모습으로 도자기를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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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페인팅을 체험할 수 있는 아틀리에.


공장 투어에는 도자기 페인팅 체험도 포함돼 있다. 아늑한 아틀리에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보는 시간이다. 원하는 디자인을 그려 넣고, 테두리를 칠하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접시가 완성된다. 한데, 물레 위에 접시를 놓고 접시 끝에는 붓을 살짝 댄 후에 테두리 선을 일정할 굵기로 마무리 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들쑥날쑥해진 굵기에 긴 한숨이 나왔다. 예쁘게 잘 그리고 싶은데, 접시를 망쳐버리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창밖엔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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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색 사슴이 그려진 그문덴 잔으로 향긋한 커피 한 잔.


체험 후엔 ‘커피와 케이크 타임’이 이어진다. 이미 테이블 위엔 그문덴의 상징, 초록색 사슴이 그려진 잔에 담긴 진한 커피와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향긋한 커피에서 전해오는 온기가 온몸에 번졌다. 잔을 지긋이 바라보니, 사슴이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경험을 쌓으러 온 거지, 점수를 쌓으러 온 게 아니잖아. 지금을 즐겨’라고.

순간, 괜한 욕심으로 새로운 경험을 망칠 뻔한 게 부끄러웠다. 잔을 비운 뒤엔 다시 마음이 잔잔해졌다. 그문드너 케라믹 공장을 나설 땐 손에 핑크색과 회색 사슴이 그려진 에스프레소 잔 2개가 들려있었다.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문덴의 추억을 소환해 줄 아름다운 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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