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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현철의 시시각각] ‘응답하라 1974’와 전기료 누진제

중앙일보 2016.08.31 18:19 종합 3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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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현철
논설위원

‘응답하라 1974’를 만들기 위해 자료조사를 해보자. 최신작 ‘응답하라 1988’이 고증 미흡 지적을 여러 번 받았으니 신경 좀 써야 한다. 미국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시끄럽던 그해, 한국의 인구는 3469만 명, 평균 연령은 24.5세였다. 젊지만 아직 가난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563달러에 불과했다. 더구나 바로 전해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원유 수출 제한으로 1차 오일쇼크가 터졌다. 1년 만에 성장률이 14%에서 9.5%로 뚝 떨어졌다. 정부는 고환율 정책을 썼다. 달러당 400원이던 환율을 500원으로 갑작스레 올렸다. 물가는 폭등했다. 석유제품 31.1%, 전기요금 42.4%, 철도요금 39%가 올랐다. 쌀과 석유는 물론 밀가루·설탕·비누 같은 생필품들이 고시제로 묶여 가격 통제를 받았다. 정치적 격동기이기도 했다.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 긴급조치 발동,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다.

그래도 희망이 부족하진 않았다. 울산 현대조선소와 거제 대우조선소가 준공됐다. 창원엔 기계 중심의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됐다. 새마을호와 서울 지하철 1호선이 처음 운행되고, 첫 국산 승용차인 포니를 생산할 공장이 착공됐다. 전기가 많이 필요했고, 그해 12월 가정용 전기에 3단계 누진제를 처음 물리기 시작했다.

드라마의 중심인 집 안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64년 ‘마포아파트’가 지어졌지만 아직은 국민 대다수가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다. 오리온 초코파이와 해태 에이스 크래커, 빙그레 투게더 아이스크림이 막 나왔다. 아이들에겐 여전히 ‘불량식품’과 ‘아이스께끼’가 대세였다. 집 안엔 변변한 가전제품이 없었다. 흑백 TV가 있는 도시가구 비중이 40.9%, 농촌은 8.8%였던 때다. 라디오와 선풍기만 있는 집도 많았다. 국산이 막 나오던 에어컨·세탁기·냉장고는 드물고 귀한 물건이었다. 삼성전자가 에어컨과 세탁기를 처음 생산하기 시작한 게 이때다. 아남전자가 14인치 컬러 TV를 선보였지만 컬러 방송은 77년에야 시작됐다. 40년 넘게 흐른 지금과 비교하면 달라져도 너무 많이 달라졌다.

얼마 전 집에 있는 가전제품을 세어봤다. 전기료 누진제 논란이 남의 일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32평형 전셋집에 18개가 있었다. TV 두 대, 냉장고, 세탁기, 김치냉장고, 전자레인지, 데스크톱 PC, 노트북 두 대, 정수기, 비데, 전기주전자, 전기밥솥, 에어컨에 스마트폰 충전기 네 개까지 포함한 숫자다. 조명에 들어간 형광등, 1년 내내 쓰지 않는 식기세척기와 토스터, 커피메이커는 뺐다.

많아 보여도 사치품이라 할 만한 물건은 없다. 아이 셋을 둔 맞벌이 가정에 필요한 것들이다. 21세기 주부에게 연탄불로 밥을 하고 냉장고를 쓰지 말라고 할 순 없다. 아이들이 컴퓨터로 숙제를 하고 스마트폰을 쓰는 걸 말릴 수 없다. 숨막히는 더위에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틀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 시대가 달라졌다. 여러 통계를 봐도 전기는 1인당 월 90킬로와트시(㎾h) 안팎을 소비하는 필수재가 됐다.

폭염만큼이나 전기요금 누진제 논란이 뜨거웠던 건 당연한 일이다. 누진제는 세월이 네 번 바뀌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국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던 70년대식 사고에 갇힌 제도다. 4차 산업혁명이나 친환경 산업 시대에 역행한다. 전체의 13%인 가정용 전기만을 옥죄면서 에너지 절약을 운운하는 건 모순이고 착각이다. 소외계층을 위한다는 명분도 빛이 바랬다. 어려운 이들일수록 전기 의존도가 높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바뀐 가구 개념과도 맞지 않는다. 74년엔 1~2인 가구 비중이 미미했다. 지금은 절반 이상이다. 1인 가구의 일인당 전기 사용량은 4인 이상 가구의 2.6배다. 어느 모로 봐도 누진제는 문제다. 논란을 해소하는 길은 두 가지뿐이다. 70년대식 복고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거나 21세기 현실을 인정하되 에너지 사용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너무도 자명하다.

나현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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