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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고비서도 신념 지켜, 중국 역사적 인물과 흡사”

중앙선데이 2016.08.28 01:06 494호 15면 지면보기

1 중국을 남북으로 잇는 대운하의 위청(盂城) 구간에서 바라본 운하 물길이다. 아직도 풍부한 수량의 운하 위로 많은 화물선이 다니고 있다.

2 중국 랴오청에 위치한 운하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과거 옛운하 사진.



528년 전 제주에서 표류해 중국 강남(江南)에 표착한 뒤 4개월 반 정도의 여정을 거쳐 조선에 귀환한 선비 최부(崔溥·1454~1504)와 그의 저작 『표해록(漂海錄)』이 지니는 의미는 자못 크다. 우선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하나는 조선의 지식인으로서 중국의 강남 지역을 살폈다는 점이다. 이는 사행(使行)의 코스를 거쳐 만주 일대와 베이징(北京)만을 살피는 데 그쳤던 조선 지식 사회의 시야를 크게 넓혔다는 의미를 지닌다. 다른 하나는 명나라 시절의 중국 땅 문물과 제도를 상세하게 적었다는 점이다.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대목이다.

3 중국의 전통 역참(驛站)으로 원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해 국가 1급 문물로 남아 있는 가오여우(高郵) 역참 내부 모습이다. 대운하를 거쳤던 많은 인원들이 묵었던 곳이다.


최부의 『표해록』 인문여행 -2·끝- 4개월 반 귀환 행적

자신이 사대부라는 점 추호도 잊지 않아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최부와 그의 저작이 주는 시사점을 조금 더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거대한 땅을 지녀 다양한 면모를 품은 중국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는 것이 옳을까라는 점이다. 그는 4개월 반 동안의 여정을 거치면서 많은 중국인과 필담으로 대화를 나눴다.



앞에서도 소개했듯 그는 자신이 조선의 사대부라는 점을 추호도 잊지 않았고 자신이 믿는 신념을 조금도 허물지 않았다. 강한 정체성을 견지하면서 원칙과 명분, 옳고 곧음을 향한 의지도 잃지 않고 중국인과의 대화에 나섰다. 그 점은 중국인들이 크게 인정하는 대목이다.



그의 처음 표착 지점인 저장(浙江)성 싼먼(三門)현 외사처 바오셴위안(鮑先元) 과장은 “절개와 지조, 청렴과 정직성으로 유명한 중국의 역사적 인물들과 아주 흡사한 면모를 지닌 조선의 선비 최부 선생으로부터 우리는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한다. 상하이(上海) 최대 신문인 신민만보(新民晩報) 전직 칼럼니스트로 최부를 연구하고 있는 팡위창(方毓强)은 “동양의 인문적인 가치로써 외국인이 중국인과 이렇게 큰 소통을 이룬 예는 매우 드물다. 죽을 고비에서도 제 입장과 신념을 접지 않았던 최부 선생의 행적은 지금의 중국인들에게도 매우 큰 감명을 준다. 중국의 위대한 인물과 비슷한 면모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부가 500여 년 전 표착했던 저장 일대는 중국 강남의 인문 전통이 매우 밀집해 있는 땅이다. 싼먼이 속한 옛 임해(臨海), 지금의 타이저우(台州)는 방효유(方孝孺·1357~1402)의 고향이다. 방효유는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朱元璋)의 총애를 받았고, 그 뒤를 이은 건문제(建文帝)로부터도 큰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건문제를 쫓아내고 자리를 빼앗은 영락제(永樂帝)와는 대립을 피하지 못했다. 결국 권력을 잡은 영락제와의 타협을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자신은 물론이고 친계와 방계, 인척(姻戚) 전부를 포함하는 10족(族)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싼먼에 주둔하면서 왜구를 물리치는 데 크게 기여했던 척계광(戚繼光·1528~1588)도 그렇다. 추상과도 같은 군기, 엄정한 태도, 청렴과 굳은 절개로 이름을 떨친 중국 역사 속의 최고 명장에 해당한다. 현지 중국인들은 최부의 표착 지점인 싼먼을 이야기할 때 이 두 사람을 함께 거론했다.

4 닝보(寧波) 고려사 박물관에 있는 중국인이 그린 최부의 초상. 싼먼=전민규 기자



“신하의 도리 지켜야”에 중국 관원 끄덕방효유·척계광이 주는 이미지가 최부라는 조선 선비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최부는 실제 그런 면모를 자주 드러냈다. 신분 확인으로 왜구가 아닌 조선 사람임이 밝혀진 뒤에도 그는 중국 관원의 조서(調書) 수정 제안에 쉽게 응하지 않았다. 중국 관원들이 최부 일행의 피해 사실을 축소하거나 없애려는 의도에 ‘정직’을 강조하며 반대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또 “당신 국왕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중국 관원이 묻자 최부는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듯 임금의 성명을 쉽게 말할 수 없는 법”이라고 응대한다. 그러자 중국 관원은 “밖에 나왔으니 괜찮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그러자 최부는 “나라 밖으로 나왔어도 신하로서의 도리는 저버릴 수 없다”고 대답한다. 이 대화는 역시 필담으로 이어졌다. 최부의 대답이 적힌 종이를 건네받은 중국 관원은 ‘읽다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或讀或點頭)’고 『표해록』은 전하고 있다.



‘중국 관원’이라고 했으나 그는 당시 도저소(桃渚所)라는 곳의 파총관(把摠官)으로 행정 전반을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최부 일행의 생사여탈(生死與奪) 권한을 손에 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관원에게도 최부는 필담을 나누면서 자신의 소신과 원칙대로 대응했던 셈이다.



어떻게 보면 최부는 심각한 ‘외곬’이자 ‘왕고집’이었다. 그럼에도 중국 관원은 결국 그런 최부를 깊이 인정했다. 꼿꼿한 태도에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을 연출했던 것이다. 고집스러웠으나 끝내 제 원칙과 믿음을 잃지 않고 정직함을 따랐던 외국의 인물을 높이 평가했다는 얘기다.



그런 최부의 기록을 읽으면서 그가 거쳤던 대운하(大運河)의 길을 따라 북상했다. 무더운 한여름의 폭염에 시달렸지만 그가 다니면서 적었던 중국 강남의 인문이 큰 매력으로 발길을 끌었다. 싼먼 바로 옆이 민국(民國) 시대 중국의 1인자 자리에 올라 전국을 호령했던 장제스(蔣介石)의 고향 펑화(奉化)였다.



우리는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에 밀려 대륙에서 대만으로 쫓겨난 ‘실패한 지도자’로 그를 기억하지만 중국 인문을 다루는 사람들은 그를 ‘유가(儒家)의 풍모를 지녔던 큰 정치인’으로 기억한다. 부하들의 부정과 부패에 갇혀 결국 정권을 내줬지만 정치적 지향은 떳떳함에 두고자 했던 정치인이었다는 얘기다.



그의 고향 펑화에 들렀을 때는 많은 중국인의 관광 행렬을 볼 수 있었다. “장제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요즘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의 고향집을 찾아 분위기를 살피려는 중국인의 발길이 펑화에 줄곧 이어지고 있다”는 게 전 상하이 신민만보 기자 팡위창의 설명이다.



펑화에서 조금 더 이동하면 위야오(餘姚)라는 곳이 나온다. 이곳은 두 가지로 유명하다. 중국 도작(稻作) 문명의 흔적, 그리고 왕양명(王陽明·1472~1529)과 황종희(黃宗羲·1610~1695)라는 인물의 고향으로서다. 왕양명(본명 王守仁)은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그는 관념화의 극치에 달해 고루한 형식으로만 흘렀던 주희(朱熹)의 이학(理學) 전통에 반기를 들어 심학(心學)의 흐름을 만들어낸 매우 걸출한 사상가다. 역시 강한 신념을 지니고 그를 끝까지 탐구한 지조와 절개의 인물이다.



인문의 전통 가득한 대운하 길 따라 귀환황종희는 명나라 말과 청나라 초에 걸쳐 살았던 인물이다. 큰 사상가로 꼽히기도 한다. 황제의 권력보다는 천하 백성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이족인 만주족의 청나라 정권이 들어서자 끝까지 벼슬자리를 거부하며 여생을 학인(學人)으로 일관했다. 사상적 중요성과 함께 기개와 절조, 굽히지 않는 신념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운하는 사오싱(紹興)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중국 현대문학의 문호(文豪)로 대접받는 루쉰(魯迅)의 고향이다. 그에 훨씬 앞서서는 중국 명필 중의 명필로 꼽히는 왕희지(王羲之)가 살았던 땅이다. 루쉰은 『광인일기(狂人日記)』 『아큐정전(阿Q正傳)』 등의 작품으로 나약해진 중국의 아픔을 지적했다. 역시 꼿꼿한 의지와 신념의 인물로 꼽힌다.



신라의 최고 지식인 최치원(崔致遠)의 자취가 남아 있는 양저우(揚州) 또한 중국 강남 지역의 인문적 매력이 듬뿍 담긴 곳이다. 그곳으로부터 대운하의 물길을 따라 더 북쪽으로 이동하면 산둥(山東)으로 접어든다. 운하가 닿는 랴오청(聊城)에 닿기 전에 지나치는 곳은 쩌우(鄒)현이다. 바로 맹자(孟子)의 고향이다.



그 옆으로 다시 짜오좡(棗莊)이라는 곳을 거쳤다. 이곳은 묵적(墨翟)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시대에 맹렬한 활동을 벌였던 묵자(墨子)의 고향이다. 대운하가 아직도 물길을 유지하고 있는 강남 땅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지역들이다. 물길이나 땅의 길을 통해 중국 인문은 이렇게 깊은 전통으로 이어진 모양새다.



500여 년 전의 조선 선비 최부는 이곳을 모두 경유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위에 적은 인물들은 그에 비해 훨씬 전, 또는 조금 전, 아니면 동시대, 또 아니면 훨씬 후에 태어나 활동했던 중국 역사 속의 유명한 인물들이다. 최부를 기념코자 하는 요즘의 중국인들은 그로부터 중국 역사 속에서 이름을 남겼던 위대한 인물들을 떠올린다.



중국적인 시선이라고 폄훼할 필요는 없다. 옳으면서 바른 정직(正直)이라는 가치는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덕목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 가치를 커다란 체계로 구성해 내내 발전시켰던 동양의 인문적 전통에서는 더욱 그렇다. 생사의 고비를 넘어가며 자신의 가치에 몰두했던 최부와 동시대 중국인들은 그 점에서 큰 소통을 이뤘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24일은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지 24주년 되는 날이었다. 둘은 이제 아주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지만 때로 심각한 갈등도 빚어진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를 두고 벌어진 최근의 마찰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장구한 한·중 교류사의 전통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최부라는 조선 선비는 그 점에서 눈여겨볼 인물이다. 전통적인 인문 바탕의 가치를 내세우며 중국인들과 큰 소통을 이뤘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정직함에 바탕을 둔 자존감, 명분과 원칙을 잃지 않으면서 결국 중국인과 속 깊은 대화로써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중국 남북을 길게 관통하는 대운하를 거쳐갔던 528년 전의 조선 선비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한국과 중국을 오래 이었던 인문적인 전통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까닭이다. 단지 그런 고유의 인문적 전통이 우리 곁으로부터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문제점은 있지만 말이다.



 



 



싼먼(중국 저장성)=유광종뉴스웍스 콘텐츠연구소장 ykj33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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