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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이상설 “내 몸 불태워 강에 뿌려라”…넋이나마 조국땅 닿고 싶었나

중앙일보 2016.08.27 02:30 종합 13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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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변의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 유허지 비석 앞에 황석영(왼쪽)·이문열 작가가 헌화하고 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어둑한 전시장 안이 갑자기 환해졌다. 강우규·안중근·이상설·최재형…. 59명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노니 고단한 땅 연해주에서 치열했던 한인들의 항일 독립운동사가 밤하늘처럼 펼쳐진다. 별도 없고 달도 뜨지 않던 암흑의 시절에, 이들은 저마다 스스로 별이 되었다. 지난 11일 러시아 우수리스크 아무르스카야 63번지 고려인 문화센터 1층 고려인 역사관.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독립운동가의 얼굴들이 별처럼 총총하다. 옛소련으로 망명했던 비운의 작가 조명희(1894~1938)는 식민지 조선에서 밀려나 변방으로 떠돌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고려인의 밤을 ‘별 밑으로’에서 노래했다.

“냉가슴을 안고 가자 가자/ 저 저문 사막의 길로 저 별 밑으로/ 그 별에게 말을 청하다가 별이 말 없거든/ 그때 홀로 쓰러지자 홀로 사라지자.”

‘평화 오디세이 2016’(이하 ‘오디세이’) 여정의 제4일은 연해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따라 이어졌다. 고려인 역사관 조성에 힘을 보탰던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이분들처럼 이름이 알려진 독립운동가는 전체 활동가의 20%가 채 안 된다”고 했다. 박 교수는 “조선 독립을 위해 일하고 싸웠지만 잊히고 버려진 대다수 항일 운동가의 복원과 조명 작업이 시급하다”며 구체안을 내놨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남북 공동 사료 발굴을 하자는 제안이다. 중국과 러시아 지역의 독립운동 조사도 중요하지만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일제의 평결문 등을 북에서 찾는 일이야말로 공존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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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2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우수리스크는 연해주 항일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1870년대부터 조선인의 이주가 이뤄져 1917년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가 이곳에서 조직될 만큼 ‘한인의 메카’로 통한다.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피땀이 이 땅을 적셨다. 독립운동 지도자인 이상설(1870~1917) 선생은 그 대표 인물이다. ‘오디세이’ 일행은 우수리스크 우체스노예 마을 어귀의 수이푼 강변에 선 이상설 선생의 유허지(遺墟地)로 향했다.

강가에 고즈넉하게 서 있는 화강석 비석이 고독했던 한 선구자의 그림자처럼 일행을 맞아줬다. 황석영·이문열 작가가 비 앞에 흰 국화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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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항일 독립운동을 이끈 대표 인물 이상설(위 왼쪽)과 최재형 선생.

이상설 선생은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침략 행위를 전 세계에 알리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뒤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우리나라 최초의 임시정부라 할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고 정통령에 추대됐다. 중국 룽징에 민족학교 서전서숙을 세워 후학을 기르고 항일 의병부대인 13도 의군,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勸業會) 등에서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선생은 수학책을 발간한 우리나라 근대 수학 교육의 아버지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17년 3월 47세로 임종에 들며 선생은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강에 뿌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동해로 흘러드는 강물 따라 넋이나마 조국 강산에 닿고 싶은 뜻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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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총살당하기까지 최재형 선생이 살았던 고택.

우수리스크 시내를 달리는 ‘오디세이’ 버스 안에서 김진태 전 검찰총장은 이상설 선생과 함께 헤이그 특사로 갔던 이준(1859~1907) 열사 얘기를 꺼냈다. “이준 선생은 18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된 우리나라 1호 검사죠. 한국 대표 검사로 추대할 만합니다.” 김종민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말을 받았다. “연해주에 묻혀 있는 우리 역사 문화 콘텐트가 무궁무진해요. 앞으로 체험형 관광 코스로 개발해 많이 와서 보고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한·러 과학아카데미 등 러시아와의 학술 교류를 늘리고 동북아 교류 박물관 등을 기획하면 한반도에 새 기운이 돌지 않을까요.”

‘이 집은 연해주의 대표적 항일 독립운동가이며 전로한족중앙총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였던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 4월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거주하였던 곳이다. 한·러 수교 20주년 기념.’ 보로다르스코 38번지 벽돌집 벽면에 붙어 있는 동판 글귀가 일행의 눈길을 붙들었다. 러시아 이름 최 표토르 세메노비치로 러시아와 중국을 누볐던 최재형(1860~1920) 선생은 기업가, 교육가, 독립운동가로 연해주 한인을 이끈 등불로 평가받는다. 일찍 일군 부(富)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거사를 지원하는 등 무장 투쟁을 주도했고, 한인 후손 교육을 위해 30여 개 학교를 세웠다. 연해주 한인들이 그의 덕행을 기려 ‘최 페치카(난로)’라 부를 만하다.

최재형 선생의 일대기를 연구한 박환 수원대 교수는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은 볼셰비키 활동 등으로 붉게 채색돼 외면당하거나 뒤늦게 조명됐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들의 공산당 활동은 조국 독립을 위한 방편이었던 만큼 민족주의운동 선상에서 재조명돼야 한다는 것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서양의 냉전은 깨졌지만 동양의 냉전은 지속되고 있다. 여기 블라디보스토크는 안중근 의사가 동아시아의 영구 평화를 꿈꿨던 곳이다. ‘오디세이’호에 탑승한 모든 이가 그 평화가 품은 광역 아시아 개념을 내일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묵상하시길 청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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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BOX] 안중근과 11인의 ‘단지동맹비’ 두 번 옮긴 유니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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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8월 26일자 1면에 소개한 ‘단지동맹비’는 그 자체만으로도 슬프고 감격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다.

2001년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연해주 크라스키노에 핏방울 형상의 단지동맹 기념비를 설치했다. 하천 변에 설치된 탓에 의미를 모르는 주민들과 낚시꾼들로부터 훼손을 당하곤 했다. 독립운동가를 테러리스트로 오해한 사람들의 고의적인 손상도 있었다.

이에 2001년부터 크라스키노에서 영농사업을 하고 있는 유니베라(옛 남양알로에)가 2006년 자신들의 농장 정문 앞으로 기념비를 옮겨 왔다. 그러나 2007년 기념비가 선 땅이 국경통제선에 편입되는 바람에 통행증이 없는 방문객들의 참배가 불가능해졌다.

유니베라는 2011년 4억여원의 비용을 들여 현재의 자리에 부지를 마련해 기념비를 옮기고 한국산 오석으로 만든 조형물들을 추가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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